2025년 3월 23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Z5Ee44Y8nAU?si=YOEqM5RU4xbhP6Xh
▣ 들어가는 말
- 평범한 인생
밀란 쿤데라와 함께 세계적인 체코의 대표적 작가인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이라는 소설은 철도 공무원으로 퇴직한, 말 그대로 평범한 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기 위해 자서전을 쓰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삶이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어느 날 시를 공부하는 한 사람이 찾아와 그에게 파문을 일으키지요.
“시가 훌륭한가 형편없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 시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아는 일이 중요한데, 그 시 속에 들어 있는 사물들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한때 코코넛 야자나무와 이상하고 인공을 발하면서 작열하던 무언가가 들어 있던 삶이 있었다.”
“두 손을 흔들며 그 시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소리친다 하더라도, 그 야자나무를 뽑아 버리고 인광을 발하며 작열하던 것을 네 삶에서 제거하지는 못해. 그런 것들이 들어 있었던 것을 너는 알고 있지. 청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대화입니다. 자기 안에 있던 그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지요. 이곳에 있는 우리도 언젠가 우리 가슴을 불태우던 불꽃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뜨거운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이리저리 방황하던 우리의 모습을 잊으셨나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 불안이기도 했고 공포와 분노이기도 했던. 때로는 슬픔이고 고독이기도 했던. 도저히 나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던 그것… 그것이 있지 않으셨나요.
“알겠나? 바로 그거야. 넌 그게 사라져 버린 게 이제 유감인 거야. 더 이상 그 시 속에 코코넛 야자나무 외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고,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었는지, 네 자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을 볼 수 있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거야. 그 당시 그것들을 보았던 것은 네가 시인이었기 때문이고, 또한 썩어 가는 고기와 용광로 같은 신기하고 괴이한 사물들을 보았어. 천사 또는 말하는 불 덤불 같은 것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당시에는 가능한 일이었어. 넌 시인이었으니까.”
“넌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해. 그것은 너의 내면에서 몰락해 버렸고 끝난 거야. 다만 왜 네 속에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부랴부랴 달아났는지를 알고 있을 뿐이지. 무엇에 그렇게 놀랐었지? 아마 그게 너무 지나쳤거나 너무 뜨거워 손가락에 불이 붙기 시작했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 인광이 두려웠거나 덤불에 불이 붙어 네게 말을 걸까 봐 무서웠는지도 몰라. 너의 내면에는 뭔가 두려운 게 있었고, 너는 쉬지 않고 달아났어. … 넌 사물들이 안전하게 질서를 이루는 그곳에 자신을 숨겼지. 그곳에서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게 없었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
그 두려움과 떨림, 불안과 타는듯한 뜨거움을 피해 우리는 안전과 안정 속으로 도망쳐온 것은 아닐까요. 우리를 두려워하게 않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더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요. 우리는 어디에서 도망쳐 온 걸까요. 우리를 두렵게 하고 전율하게 하는 것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 이름 불려질 때,
- 누구의 소리인가?
“누구의 소리였을까. 메마르고 황량한 벌거숭이 산등성이에 자란 볼품없는 가시나무 한그루. 마치 불이 붙은 듯 나를 향해 함성을 지르는 듯. 작열하는 태양 아래 뜨거운 땅의 숨 막히는 듯한 열기 때문이었을까. 물기라고는 없는 바싹 말라버린, 잎사귀 하나 없는 메마른 나무. 그 나무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마치 불이 붙은 듯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건다. 불덩이보다 더 뜨거운 말을.…”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대면하는 순간을 나름대로 그려보았습니다. 흔히 모세의 소명이라 알려진 장면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동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도망자로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이제는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젊음의 활력과 열정은 사그라지고 어느덧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불길이 일어나 맹렬한 기세로 이글이글 타오릅니다. 그런데 불은 나무를 태워버리지 못합니다.
모세가 신을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신의 부름을 경험하는 순간이지요. “모세야, 모세야~” 신께서 그를 부릅니다. 놀랍고도 두렵기도 한, 신비한 장면입니다. 저도 어린 시절 기도원에 들어가 이런 장면을 기대하며 열심히 기도했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대체 인간을 향한 “신의 부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이는 글자 그대로 외부에서 오는 신적 계시처럼 보이지만, 상징적으로 보면 모세 내면에서 꺼지지 않는 어떤 갈망, 혹은 부정할 수 없는 소명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모세는 이집트 왕자의 신분으로 자랐지만, 히브리인으로서의 뿌리를 부정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젊은 시절, 동족에 대한 이집트인의 학대를 보고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친 것은, 그의 내면에서 정의에 대한 강한 부름(혹은 양심)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요.
이후 미디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던 그가 다시금 신의 부름을 받는 것은, 결국 자신이 피하려고 했던 정체성과 소명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요. 즉, 부름이란 외부에서 강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의 내면에 존재했던 것인데, 이것이 신을 통해 다시 되살아 난 것이라는 말이지요. 차별과 불의에 저항하려 했으나, 그러한 저항하는 모세 자신의 삶이나 모습도 오롯이 자신의 삶은 아니었지요. 그가 가진 신분, 그가 가진 지식, 그가 가진 능력, 경제력, 영향력…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이 저항하려는 자들이 그에게 부여한 것이었으니… 자신은 불의와 차별에 대한 저항이라고 믿었겠지만, 실상은 자기의 의에 기반한 저항 아니었을까요. 그는 차별과 억압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것 아닐까요. 그저 그런 것에 저항하는 나름 훌륭한 자아상을 가지고 싶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사실 얼마나 어설프고 가소로운 저항이었을까요. 진정한 저항, 진정한 소명은 그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사는 것 아닐까요. 먼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때에야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자신의 에고를 넘어선 진정한 저항과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꺼지지 않는 불꽃
떨기나무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는 것은, 모세 내면의 소명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나다운 삶”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억누르려고 할 때가 있지만, 진정한 소명은 불처럼 사라지지 않고 가슴 깊숙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모세는 신의 부름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부합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4:10)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4:13)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우리도 자기 자신다운 삶을 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릴 때, 그것을 부정하고 두려워하고 회피합니다. 모세는 단순한 사명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본질과 직면해야 하는 부름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꺼지지 않는 내면의 소망과 열망이 있습니다. 사회적 기대나 두려움, 의심 등으로 이것을 무시하고 외면할 수 있지만, 결국 가장 자기다운 삶이란 그 부름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요. 신의 부름을 신비한 초월적 명령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만드는 초대입니다. 즉, 모세의 이야기는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초대의 철학
- 삶은 초대의 과정이다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은 프랑스의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로,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탐구를 한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초대(invitation)’의 과정으로 봅니다. 인간의 삶을 하나의 강제된 명령이 아니라, 끊임없는 초대로 본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외부의 어떤 힘(신)에 의해 ‘강제적으로 살도록 정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어떤 초대를 받고 그것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실존주의(특히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창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마르셀은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존재라기보다, ‘삶이 우리를 초대할 때 그것에 응답하는 존재’라고 봅니다. 멋있지요.
- 신의 부름은 초대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신의 부름을 받았을 때, 신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의 방식으로 모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여호수아가 신을 벗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이는 강제적인 복종이라기보다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라는 초대로 볼 수 있습니다.
마르셀은 인간 존재를 ‘문제(problem)’가 아니라 ‘신비(mystery)’로 봅니다. 문제란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수학 문제나 과학적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우리가 단순히 분석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차원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 사랑, 죽음, 신앙, 초월성 등의 개념은 ‘문제’가 아니라 ‘신비’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의 부름이 우리에게 임했을 때,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 신비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비로운 초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신의 부름이 임했을 때, 그는 그분의 부름을 문제를 푸는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 속으로 초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모세의 반응을 살펴보면,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이 큰 광경을 보리라” 그의 첫 반응은 구경꾼이고 방관자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사건이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은 그저 멀리서 구경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신의 부름은 정확히 그를 겨냥합니다.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는지라” 하나님은 그를 방관자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진정한 삶은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여하지 않는 부름은 부름이 아닙니다. 신과 만남, 신의 부름, 진정한 자아의 부름은 초대입니다. 참여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나와는 분리된 객관적인 어떤 대상을 다루는 문제나, 문제 풀이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자세히 보면, 모세의 태도가 조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경꾼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 것이 보이지요? 이제는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마르셀은 인간이 존재의 초대를 받았을 때, 그것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강조합니다. 초대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에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가 초대에 응답하지 않으면, 존재는 우리에게 닫힌 채로 남게 됩니다. 인간은 삶에서 계속해서 ‘존재의 부름’을 받으며, 이에 응답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의 부름”개념과도 상통합니다. 그는 “존재는 우리를 부른다”고 말합니다. 하이데거에 다르면, 인간은 “그들(Das Man, - 잡담, 호기심, 애매성 속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존재가 우리를 부를 때, 우리는 본래적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머뭇거리고 있는 모세에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해 줍니다. 놀랍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말을 잘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십시오” 거절하고 도망치려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함께 계신 그분의 숨결을 느끼십니까. 그분과 함께하는 특권은 초대에 응하는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요. 진정한 존재로 나아가는 이들만이 참된 존재를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신비에 몸을 맡기는 참여’입니다. 삶을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비로 보아야 보이는 세계입니다.
▣ 나가는 말
- 신의 부름은 우리가 억누르고 있었던 진정한 자신을 깨우는 것입니다. 내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의 형상’을 살리는 것이고, 진정한 자신으로의 초대, 존재의 부름입니다. 신은 인간을 강제로 부르지 않습니다. 인간성을 파괴하고, 인간의 의지를 묵살하는 신은 진짜 신이 아닙니다. 신의 부름은 신의 유익이나 영광을 위해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름은 무엇보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름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모세도 처음에는 거부했고, 여호수아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부름에 응답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자기 자신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부름을 받을 때, 그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초대에 응답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응답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신의 부름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름은 단순히 어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지요.
- 신의 부름은 절대자의 명령이 아니라, 함께 하자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그 부름에 응할 때 신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새롭게 형성되는 것입니다. ‘신을 벗는다’는 의미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어떤 방어막을 내려놓고, 더 직접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라는, 관계를 맺으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즉, 자기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가면, 역할, 고정관념 등을 내려놓고 본질적인 자기 자신으로 서라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계산을 내려놓고, 더 본질적인 신뢰와 존재의 깊이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신을 벗는 것은 무방비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자기 자신과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자기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이 외치는 소리를 듣기를 소망합니다. 그 불꽃마저 꺼져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부름, 초대 앞에서 방관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신비에 가득찬 삶을 살기를, 기꺼이 신발을 벗어 맨발로 그 불꽃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이름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 존재의 부름을 듣게 하소서.
언제나 너와 함께 하겠다 약속해 주시는 주님을 믿게 하소서.
기꺼이 신을 벗고 당신 앞에서 진정한 자신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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