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er::bec483ba-d204-47d4-afbd-8005746530c3

대림절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 8 : 1 - 11)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e2ZKNfqKlRk?si=p0te_rw-sYuYtXfd

▣ 들어가는 말

-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

지난 11월 28일 천주교 사제 1,466인의 시국선언문의 제목입니다. 명문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를 지켜볼수록 ‘저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나 못할 일이 없겠구나.’(창 11:6) 하는 비탄에 빠지고 맙니다. 그가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여 묻습니다. 사람이 어째서 그 모양입니까? 그이에게만 던지는 물음이 아닙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마는’(7:19) 인간의 비참한 실상을 두고 가슴 치며 하는 소리입니다. 하느님의 강생이 되어 세상을 살려야 할 존재가 어째서 악의 화신이 되어 만인을 해치고 만물을 상하게 합니까? 금요일 아침마다 낭송하는 참회의 시편이 지금처럼 서글펐던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보소서 나는 죄 중에 생겨났고 내 어미가 죄 중에 나를 배었나이다.’(시 51:5, 7)”

“그는 있는 것도 없다 하고, 없는 것도 있다고 우기는 ‘거짓의 사람’입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은 다 없애고, 쳐서 없애야 할 것은 유독 아끼는 ‘어둠의 사람’입니다. 무엇이 모두에게 좋고 무엇이 모두에게 나쁜지조차 가리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앞세우는 ‘폭력의 사람’입니다. 이어야 할 것을 싹둑 끊어버리고,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을 마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하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민이 맡긴 권한을 여자에게 넘겨준 사익의 허수아비요 꼭두각시. 그러잖아도 배부른 극소수만 살찌게, 그 외는 모조리 나락에 빠뜨리는 이상한 지도자입니다.”

윤석렬과 그 정권, 거기에 빌붙어 사익만을 추구하는 이들을 보면서, 인간이 이렇게 추해질 수 있구나 생각해 봅니다. 더 말해 무엇할까요. 정말이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그러면서 세상은 왜 이리도 아름다운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문제의식입니다. 세상은 왜 이렇게 많은 고통으로 가득할까요. 인간이 어찌 이 모양일까요. 그러면서도 세상은 어찌 이다지도 아름다운지요. 사람은 얼마나 고귀하고 숭고한지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글을 써왔고 결국, 그의 모든 글은 ‘사랑’을 지향하고 있다는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역시, 노벨상을 받을 만하다’ 생각했습니다.

 

▣ 무엇을 원하는가?

- 고뇌의 때

본문의 때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 주간입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저녁이 늦도록 주님은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분은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루살렘 밖의 올리브 동산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이제 백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압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야겠고,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야 했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마지막 한 사람도 만나시고서. 이제 자신도 쉬셔야 할 터인데, 그분은 산으로 올라가시죠.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지 깊은 고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체, 동행함,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무엇인지 아셔야 했고, 그 뜻을 따를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기도와 명상으로 밤을 지새우시고 아침 일찍 다시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많은 백성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말이지요. 모든 것, 혼신을 바쳐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셨던 것이지요.

- 율법에는…

그 성전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옵니다.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의 생각은 어떻소?”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예수에게 쏠립니다.

성경에 나타난 율법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동산 가운데 두셨던 생명 나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지켜야 할 규칙이었으니 말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나무는 죽음의 나무가 아니라 생명의 나무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일 돌로 치라 하면, 자비가 없고, 자비를 베풀면 정의가 실현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를 다 포기할 수 없기에 예수님은 곤경에 처합니다. 자비를 거부하면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를 부정하게 되고, 정의를 거부하면 율법을 어기는 자로 고소당하게 되겠지요.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율법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정말 사회적 정의를 원하는 것일까요. 오늘날 동성애 문제에 대해 교회의 행태를 보면, 꼭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같습니다. 그들은 정말 세상에서 부정의를 몰아내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리도 모진 말들과 비난을 쏟아내는 걸까요.

우리가 움켜쥔 돌들은 누구를 향한 것일까요. 여인을 향한 것인가요. 불의한 세계, 짐승 같은 인간 윤석열과 그 일당을 향한 것인가요. 예수를 향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닐까요.

 

▣ 존재를 대면하다!

- 침묵하시다

예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와 찢어진 남루한 옷차림으로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떠는 한 여인, 먹잇감을 노려보고 있는 짐승처럼 오만함과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경멸의 눈빛으로 음란한 여인을 바라보는 백성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바라보셨을까요. 그들 눈에 담긴 노여움과 어리석음을 보셨을까요.

말없이, 가만히 몸을 구부립니다. 바닥에 무언가를 씁니다. 이런 행동을 두 번이나 보여줍니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복음서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쓰셨을까요. 이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자신의 선고문, 백성들의 죄) 그러나 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기록했겠지요. 저는 예수의 그 행동은 언어의 중단, 대화의 중단처럼 보입니다. 군중이 요구하는 즉각적인 판단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으로 시간을 제공합니다. 숙고하고 또 숙고합니다.

하이데거는 침묵을 “존재가 드러나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침묵은 무의미한 말이 가려버릴 수 있는 존재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이를 통해서 침묵은 ‘언어 이전’, 혹은 ‘언어 너머’에서 존재의 진실과 연결되는 통로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언어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대면하는 열린 상태를 창출하는 적극적 행위입니다. 즉, 예수의 행위는 군중이 자신의 판단과 죄를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며, 존재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만듭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했습니다. 이 말은 단지 논리적 명제를 넘어선 주제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와 사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주제들을 말보다는 삶으로 경험하고 실천하라는 철학적 권고이지요. 결국, 예수의 침묵은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서 더 깊은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져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여전히 침묵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주님은 몸을 일으켜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서 신명기의 말씀을 바꾼 것입니다.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 17:7) 여호와 앞에서 가증한 일을 행한 자, 이방신을 섬긴 자에 관한 처벌조항입니다. 구약 여호수아에서 죄를 범한 아간을 처벌하는 장면에서도 등장하지요.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물건들도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수 7:25-26) 돌을 던지는 첫 사람이 증인,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증인이 맨 먼저 돌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따라가게 됩니다.

이 구절에서 “증인”을 “죄 없는 자”로 대체하신 것입니다. 범죄를 목격한 자가 아니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은 그저 ‘우리는 모두 다 죄인이다.’ 식의 말이 아닙니다. 밖을 향하던 시선을 내부로 돌리는 것이지요. 여인에 대한 심판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바라보게 합니다. 각자의 마음에 들어 있는 악을 보지 못한 눈먼 상태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단순한 명제적 진리(참과 거짓) 이상의 것으로, 존재가 감춰진 상태에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예수는 군중에게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하며, 그들의 숨겨진 위선과 본성을 드러냅니다. 진리는 단순히 법적 판단의 적용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군중은 여인을 정죄하려 하지만, 예수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죄성을 자각합니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존재 망각”에서 “존재 자각”으로 변화하는 순간입니다.

-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849년 12월 22일, 사형집행을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사형대 위로 끌려가서 정치범으로 총살형을 받는다는 선고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20분쯤 후에 사면령이 내려져 그보다 감형된 형량을 선고받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두 개의 선고 사이에, 즉 20분 아니면 적어도 15분 동안 ‘나는 몇 분 후면 죽을 것이다’라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지요.”(도스토옙스키, 『백치』 중)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고, 그 교회의 황금빛 용마루는 태양 빛에 이글거렸습니다. 그는 눈부시게 이글거리는 그 교회 꼭대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지요. 그는 ‘저 빛이야말로 나의 새로운 자연이다. 3분 후에 나는 저 빛과 융합될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 속에 묘사한 글은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경험을 그린 것입니다. 사형수는 삶에 대한 극도의 집착과 동시에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더 이상 살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며, 삶의 무상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죽음 직전의 순간에 삶의 모든 순간이 절대적으로 소중함을 느끼며, 그 순간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강렬하게 고민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위대한 대문호가 됩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구역질나리 만큼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모든 이들 앞에 노출한 채로 죽음을 기다리며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백성들의 판결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곧 그들의 증오에 찬 돌덩이들이 날아오겠지요. 죽음이 눈앞에 있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삶의 순간순간이 얼마나 찬란하고 귀한 것인지 깨닫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삶이 너무나 비루하고, 허망하다고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면, ‘실존적 불안을 대면’하는 순간입니다. 어째서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가, 동시에 내 삶은 어찌 이리도 비루하고 추한가!

그러나 이 불안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비본질적 상태에서 본질적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을 깨닫게 되지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여인은 예수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실존으로 나아갈 기회, 가능성을 얻습니다.

 

▣ 나가는 말

- 돌을 놓고 존재와 대면하라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 8:59) 군중의 짱돌을 움켜쥔 손이 보이십니까. 돌 같이 굳고 굳은 우리의 마음, 영혼이 보이시나요. 군중들이 들었던 돌은 누구를 향한 것이었을까요. 사회의 정의를 위한 것이었나요. 불의에 대한 분노였나요. 그것은 결국 돌멩이처럼 굳어버린 우리의 삶, 우리 영혼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요. 그런 우리의 일그러진 영혼은 예수마저 성전에서 쫓아내고야 마는 것 아닐까요. 불쌍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먼저 초라하고 메마른 우리의 얼굴, 우리의 영혼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 그들이 떠난 자리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나간 성전 밖에는 돌판에 새겨진 차가운 율법의 문자가 있고, 그들이 없는 성전 안에는 신비가 있습니다. 고발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그녀는 눈으로 확인합니다. 마침내 그녀는 사랑과 자유의 지평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과 홀로 남습니다. 예수님만이 홀로 여인 곁에 남아 계십니다. 율법에 미친 자들에게 둘러싸여 죽음 가까이 갔던 여인이 이제는 하나님의 한없는 자비 가운데 홀로 남아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장면에 대해 “자비와 비참, 둘만 남았다”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결정적 순간에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자신의 비참함입니다.

우리 안에는 간음죄도 있고, 간음한 자를 돌로 죽이려는 율법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돌을 들기 전에 먼저 내 안에서 진정한 자아를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타인의 죄, 세상의 죄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추함과 비참함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과 세상을 만나기에 앞서 무엇보다 자신을 먼저 만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 후에야 타인과 세상을 온전히 만나고, 세상을 향해 분노의 돌멩이가 아니라 저항의 촛불을 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음행을 행한 여인의 깨달음과 해방이 저와 여러분께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설교의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