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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천국, 질적인 변화의 세계

마태복음 13:44-52, 성령강림절후 6째 주일, 2011년 7월24일

    

신약성경에는 똑같은 의미지만 표현이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천국과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은 한자이고 하나님 나라는 순전히 우리말입니다. 그런 탓에 서로 다른 말처럼 들립니다. 성경을 번역한 분들이 왜 그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헬라어로 천국은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이고, 하나님 나라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입니다. 양쪽 모두 ‘나라’라는 뜻의 바실레이아를 똑같이 사용합니다. 우라논은 하늘이라는 뜻의 우라노스의 2격 변화이고, 데우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데우스의 2격 변화입니다. 두 단어를 한자로 일관성 있게 하려면 하나님 나라를 신국(神國)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우리말로 하려면 천국을 하늘나라로 해야 합니다. 어쨌든지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똑같은 의미입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단어를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천국은, 즉 하늘나라는 무엇인가요?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인 마태복음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는 곧 하나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비유라고 봐도 좋습니다. 세 가지가 나옵니다.

 

     보화, 장사꾼, 그물

     첫째,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고 했습니다.(44절) 보화는 천국을 수식합니다. 천국이 보화처럼 귀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비유라는 걸 다시 생각하십시오. 천국을 실제적인보화, 또는 돈으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천국마저도 돈의 가치로 환산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보화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이라는 의미일 뿐입니다.

     보화가 밭에 감추어졌다고 합니다. 밭의 흙속에 묻혔다는 뜻인지 한 구석에 다른 것으로 덮여 있다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천국의 속성은 은폐성입니다. 어린 시절 소풍 나가서 보물찾기를 한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보물 이름을 적은 종이쪽지는 나뭇가지 사이에, 낙엽 밑에, 돌 밑에 숨어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면서는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천국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크게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시에 설명하기도 어려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화를 찾은 사람에게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건반이 깊다.”는 백건우 피아니스트의 경험이 그와 비슷합니다. 피아노 음악의 어떤 경지에 들어가야만 경험될 수 있는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은폐되었습니다.

     천국이 은폐되어 있다는 말은 곧 생명이 은폐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다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모릅니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빠른지 한 평생이 번갯불의 한 순간 같습니다. 생명의 나라인 천국은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거가 충동질 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존재방식이고 통치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밭에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이 어떨지 상상이 갈 겁니다.

     둘째,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했습니다.(45절) 첫째 비유가 천국을 보화라고 했다면 둘째 비유는 진주라고 해야 하는데, 장사와 같다고 합니다. 첫째 비유는 천국의 속성을 말한다면 둘째 비유는 천국을 경험한 사람의 태도를 말합니다. 천국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심정이 어떨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직 그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마치 참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구도자와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천하에서 가장 좋은 진주를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일지 모릅니다. 우연은 곧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좋은 진주를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를 따라나선 것과 비슷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손에 넣었습니다. 첫째 비유에서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요즘말로 ‘올인’했습니다. 그에게 다른 것은 무의미했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좋은 진주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 천국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영적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천국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십시오. 교회에 열심히 나오라는 말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처리되는 문제들입니다.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교회봉사와 세상봉사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천국과 천국의 소유한 속성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거기에 던집니다. 자기에 대한 관심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천국을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47절) 세 번째 비유는 앞의 것들과 차이가 납니다. 그물을 다루는 어부라고 하든지, 아니면 그물에 걸려든 좋은 물고기라고 하는 게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 차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는 그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물을 다루는 어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혔습니다. 그러자 어부는 좋은 물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렸다고 합니다.(48절)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세상 마지막 때 천사들이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서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지난 주일의 본문인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와 비슷합니다. 세 번째 비유에서 핵심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마지막 때에 새롭게 구성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속성입니다. 그 천국이 아직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뒤섞여 있는 그물처럼 이 세상에 사이비 생명이 뒤섞여 있지만 결국에는 참된 생명의 세계가 올 것입니다.

 

     질적인 변화

     우리는 위에서 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유를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감춰진 보화였고, 두 번째는 진주 장사였고, 세 번째는 그물이었습니다. 약간씩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는 이 비유의 공통점을 무엇일까요? 천국이 어떻다는 말인가요? 공통되는 요소는 변화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모양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입니다. 첫 비유를 보십시오. 보화가 밭에 감춰진 상황과 그것이 발견된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치웠습니다. 둘째 비유에서도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 소유를 다 팔았습니다. 보화와 진주를 발견한 뒤에는 이 사람들의 모든 삶이, 가치관이, 세계관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셋째 비유에서도 한 그물에 섞여 있던 좋은 물고기와 못된 것이 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적으로, 질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변화가 곧 천국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가 앞으로 45억년 후에 어떻게 될지를 말하라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지구가 우주에 태어난 세월이 45억년인데, 앞으로 그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없어진다는 사실 말고는 우리가 더 정확하게 말할만한 내용은 없습니다. 지구에서 경험하는 생명 현상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마당에 지구 너머의 생명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것을 실증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이비 이단의 교주들뿐입니다. 과학적으로는 그렇지만 신앙적으로는 분명하게 말해야 하지 않느냐, 요한계시록 등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그 나라의 생명을 비유적으로 말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비유 중에서도 훨씬 극단적인 비유로 기록된 묵시문학입니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려는 것은 이 세상의 생명이 질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이지 그 변화된 생명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궁극적인 진리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 자체는 아닙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입니다. 피조물의 근본 한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받았다고 성서기자들이 전합니다.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주의 영광을 생명이라는 낱말로 바꿔도 됩니다. 모세는 원초적 생명을 경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얼굴에 신적인 후광이 서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영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모세마저 생명의 근본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인데, 지금 우리가 그것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설명을 너무 멀게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지금 여기서 생명을 생생하게 경험한다고 말입니다. <나는 가수다> 같은 오디션 방송을 보면서, 또는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경쟁을 보면서 살아있다는 경험을 합니다.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사업을 확장합니다. 이런 생명 경험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죽은 뒤 천국에 가서도 그런 방식의 삶을 기대합니다. 소위 천국 상급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늘 경쟁 논리에서만 생명을 경험합니다. 매스컴의 광고와 기업 논리에 얼마나 철저하게 길들여지는지를 보십시오. 교회생활도 그런 방식으로 합니다. 신앙의 내용이 거의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비하듯이 신앙생활을 합니다. 개인의 신앙에서, 그리고 교회 구조에서 생명이 철저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몇 달 전에 스티븐 호킹(69세)은 영국 가디언 지와의 인터뷰에서 ‘천국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내용이 전 세계 매스컴을 탔습니다. 그가 한 말은 전혀 틀린 게 아닙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생각한 천국은, 그리고 적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그들은 우주 공간 어디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좋은 집, 좋은 가족과 친구, 멋진 공원과 식탁, 완전한 복지 시설을 머리에 그립니다. 그런 나라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땅의 나라입니다. 이는 포이에르바흐나 니체 등이 비판했던 자아 투사적인 종교에 불과합니다. 공주와 왕자처럼 살고 싶다는 염원의 표출일 뿐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절대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차원의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이 질적인 변화의 세계라는 말은 천국이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지 모르겠습니다.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설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입니다. 창조의 하나님만이 새롭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 세상이 곧 부활생명의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그 부활생명의 세계가 곧 천국입니다. 그게 어떤 세계일지 여러분은 아예 상상하지 마십시오. 상상할수록 왜곡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천국을 기다리십시오. 그런 기다림을 아는 사람은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보화와 진주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기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아멘.

마태복음 13: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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