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74gE_GCSZJ0?si=OouFKAc_zVtydVOE
▣ 들어가는 말
- 초대장
“손에 나침반을 든 나의 동시대인들은 내가 오른쪽이나 서쪽으로, 혹은 왼쪽이나 동쪽으로, 혹은 앞이나 뒤로 향하지 않음을 지극히 과학적으로 확인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적으로 내가 방향을 잡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닥치는 대로 걸어간다고 말이다. 마치 바람처럼.” “나침반은 한 번도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하게 지시해 주지 않았다. … 왜 그들은 하늘이 아니라 그저 동서남북만 가리키는 나침반 같은 도구들을 사용한단 말인가? 그들의 도구는 하늘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그로부터 그들은 하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에겐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바로 그 하늘이야말로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할 수 있어도, 이 점만은 그럴 수 없다. 나는 하늘로 초대받았다.… 내 평생 받아본 모든 초대장 중에서 그것은 기필코 나의 참석으로 답하고 싶었던 유일한 초대장이었다.”(비르질 게오르규 신부, 『25시에서 영원으로』 중)
이 세계에서 우리를 이끄는 나침반(네비게이션)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성공과 안락함을 향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디로 가야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 어떤 학교로 진학해야 하고,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그러나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침반도 우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영화 『브루탈리스트』를 보았습니다.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브루탈리즘은 1950~1970년대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으로 기능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니 브루탈리스트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 영화의 주인공 라즐로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건축가입니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와 힘겹게 살고있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해리슨이라는 기업가를 통해 지역을 대표하는 건물을 건축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라즐로가 그 건물에 관해 설명하면서, 공간을 좁게 만들고 천정을 높게 만든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볼 것이라고 말이지요. 의도적으로 공간을 좁게 만들어 답답함을 느끼게 만들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위로 향하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근사하지 않습니까. 그 꼭대기에는 빈틈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있고, 그 빛은 그 건물 중앙에 위치한 새하얀 대리석 위에 십자가 모양을 남기게 됩니다.
우리를 둘러싼 동서남북, 사방에 펼쳐진 공간에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위를 바라보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인간의 시선을 위를 향하도록, 보이는 것을 초월하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오늘의 본문 말씀을 살펴보려 합니다.
▣ 그리스도인
-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해 제자들의 수가 심히 많아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이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유대교에 상당한 위협으로 느껴졌고 결국, 박해로 이어지게 되지요. 이로 인해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고, 이것은 복음이 이방으로 확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불을 끄려고 물을 부었는데, 기름이 튀면서 오히려 불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빌립 집사는 유대를 건너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당시 사마리아는 유대인과는 다른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의 사역은 복음의 확산에 큰 전환점을 마련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방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베드로는 후에 로마에 가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로마에서 그는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로마 교회와 전 세계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복음의 확산 과정에서 안디옥교회가 탄생합니다. 당시 안디옥은 예루살렘 북쪽 약 489km, 지중해 연안에서 동쪽으로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 제국 내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1세기 당시의 안디옥은 동서의 다양한 문화가 혼재된 인구 약 50만의 국제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전체 인구의 약 1/7 정도가 유대인일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안디옥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박해받은 성도들이 안디옥으로 모여들었고 그들로 인해 교회가 생겨난 것이지요.
안디옥은 철학 등의 학문과 다양한 문화를 꽃피운 곳일 뿐 아니라 퇴폐의 도시로도 유명했습니다. 다양한 역사와 문화, 민족이 어우러진 도시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안디옥은 복음이 전파되는 데 있어 역사상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입니다. 이방 선교의 발상지이자 거점이지요. 아시다시피 예수를 믿는 이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린 곳(11:26)이기도 하고, 할례 문제, 율법과 은혜에 대한 논란이 처음으로 야기된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15:1,2, 갈2:11-21).
이 안디옥교회의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의 목회자로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11:24) 바나바의 목양에 힘입어 안디옥교회는 더 크게 성장해 바나바는 혼자 사역을 감당하기에 벅찬 것을 깨닫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한 채 고향인 다소에 내려가 있는 바울을 찾아가 그를 동역자로 부르게 되지요. 그리고 흉년이 들었을 때, 고국에 부조를 보내기도 하는 모습 등을 고려해보면, 그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지도자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3:1)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먼저,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교회에 파송한 목회자입니다. 박해의 시대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이방의 도시에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에 보내진 목회자이지요. 그러니 가장 적합하다 여기는 인물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의 별명은 “격려의 아들”입니다. 별명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이었을지, 그런 복잡한 상황에 어떤 사람을 보냈을지 짐작이 됩니다. 바나바는 재산을 팔아 공동체에 나누어 주는 등 자신의 재산과 마음을 기꺼이 나누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혼란스러운 교회를 위로하고 안정시킬 적임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후, 함께 했던 바울과 갈라지는 장면(15:36~41) 등을 고려해보면, 그는 마음이 따뜻하고 온유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인물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인데, ‘니게르’라는 말은 그가 아프리카 지역 출신 즉, 흑인이라는 말입니다. 흑인은 유대인들이 저주받은 함의 자손이라 생각해서 멸시하고 천시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흑인이 지도자 중의 한 명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지요. 세 번째 인물은 “구레네 사람 루기오”입니다. ‘구레네 사람’은 현재의 리비아를 말하는데, 그의 이름은 로마식입니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이면서 로마식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로마인이 양자로 삼은 경우이거나, 노예이거나 둘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루기오’라는 이름은 당시의 가장 흔한 노예의 이름입니다. 즉, 그는 노예였던 것입니다. 교회 문을 나서면 그는 노예의 신분이었으나 안디옥교회에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지요. 굉장합니다. 네 번째는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입니다.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말은 헤롯과 같은 유모의 젖을 먹었다는 말이지요. 즉, 헤롯 가문의 사람입니다. 헤롯 대왕은 예수가 태어났을 때,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세례 요한을 죽인 자는 대 헤롯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이 사람이 ‘헤롯의 젖동생’에서의 헤롯입니다. 헤롯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를 죽인 자입니다. 이렇듯 헤롯 가문은 초기 기독교의 최악의 박해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문의 인물이 교회의 지도자인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울”입니다. 11장 19절에서 스데반의 일로(교회의 박해) 흩어져서 안디옥으로 온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안디옥입니다. 안디옥교회는 터키의 갑바도기아 지방의 산중에 있습니다. 3세기 말까지 예배당을 갖지 못해서 동굴 속에서 예배를 드렸던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들이 삶의 자리를 잃고 이런 동굴 속에서 살게 된 원인이 사울의 박해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사울의 박해가 너무나 잔인하고 극심했기 때문에, 그가 회심하고 개종한 후에도 아무도 그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10년 이상 은둔자의 삶을 살게 되지요. 바로 그런 사울을 바나바가 데리고 와서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교회입니다. 노예와 흑인과 원수의 형제와 자신들을 악랄하게 박해했던 사람까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지도자로 받을 수 있었을까요.
▣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의 의미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이 세계는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 이름 붙인 것이지요. 그들의 생각, 언어, 삶의 방식이 뭔가 달랐다는 것이고, 그것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담아낸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회와 신앙인들을 향한 이름 매김은 ‘개~독’인가 싶어 너무 씁쓸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교회를 떠나라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지경입니다.
어쨌든 이 명칭을 통해서 세계가 성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처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핵심적 의미가 무엇인지 등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명칭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세주이자 공동체의 중심으로 받아들였음을 나타냅니다. 신앙의 정체성의 토대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신앙인들의 정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이지요. “나는 예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둘째, 안디옥 교회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인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모든 차이와 차별을 넘어 보편적 공동체인 것이지요. 따라서 서로 연대하고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입니다. “나는 타인/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가?”의 문제이지요. 셋째,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은 당시 주류 사회나 기존 종교 체계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정체성은 기존의 사회/문화/종교적 관습에 도전하며 새로운 가치관과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것이지요. “나는 무엇에 저항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는 선교의 기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홀로 자신의 앞길만을 비추는 삶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는 빛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나는 어떤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 하나님의 형상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나는 이 지상 세계에서 처음으로 접한 형상이 인간의 얼굴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매우 자랑스럽다. 사람의 얼굴을 봄으로써 나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우주 전체를 본다.”(비르질 게오르규 신부, 『25시에서 영원으로』 중) 멋진 표현이지요. 태어나 처음으로 본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이었고, 그 얼굴은 단순히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그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는 얼굴이라는 것이지요.
“이 첫 번째 형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이콘이었다.… 하나의 이콘, 그것은 참으로 하나의 형상, 그것도 순전히 지상적인 그런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적이고 동시에 인간적인 형상이다. 천상에도 속하고 지상에도 속하는 형상이다.” “이콘은 이 세상의 현실을 표상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이콘은 하늘을 향해 열린 창문과 같다.” “교회 안에는 단 하나의 완전한 이콘이 있다.… 그리스도의 얼굴 이콘이다.” 이콘, 혹은 아이콘이라 불리는 것은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 성인을 묘사하는 성화를 뜻하는 것인데, 이것을 통해 천상의 세계, 하나님을 보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이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지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선언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이콘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세계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늘을, 하나님의 나라를 엿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안디옥 교회가 그런 지도자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기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하고,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럴 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형상은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는 “테오포리” 하나님을 지닌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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