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로마서 7:15-25, 성령강림절후 셋째 주일, 2011년 7월3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리스도교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갈림길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갈등이 그것입니다. 결국 유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방 그리스도교 전통이 그리스도교의 주체 세력으로 나섰습니다. 그 전통의 중심에 바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리는 거의 바울에 의해서 체계가 잡혔습니다. 칭의론, 교회론, 종말론이 다 그렇습니다. 27권 신약성경 중에서 10권 내외가 바울의 편지들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바친 사람입니다. 건강도 시원치 않은 가운데서도 용맹정진의 태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고, 그 과정에서 받은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신앙, 신학, 영성, 선교,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요, 교회 지도자로 인정받을만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예상을 깨는 발언이 나옵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아무리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실수를 한다는 뜻일까요? 그래도 표현이 너무 심합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는 말은 철없는 아이들의 반성문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이런 표현을 오늘 본문에서 반복합니다. 18b절은 이렇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고전 13장에서 사랑예찬을 기록한 사람이 ‘선을 행한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어서 19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가는 발언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파렴치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용서받지 못할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라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의 부도덕성을 까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기를 쳤다거나 간음을 행했다거나 누구를 모함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수준의 잘못을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 같은 수준의 영성가요, 신학자들의 자기 고발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성철의 열반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에 가득한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간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지니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태양이 붉은 빛을 토하면서 푸른 산에 걸렸구나.” 거의 평생을 암자에서 구도 정진하던 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크게 저질렀다는 말인지 이상할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인식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절대 진리 앞에서 자기의 말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를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는 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왈가왈부가 아니라 어떤 근원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율법과 죄
그것을 알려면 로마서 전체 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과 의(義)의 문제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삶을 끌어가는 규범입니다. 예를 들자면 십계명이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바로 율법에 담겨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수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거기서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대 종교의 엘리트들인 서기관은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새인은 율법을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는 말 그대로 율법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종교적인 차원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율법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우리에게는 실정법입니다. 온갖 종류의 법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칙이 있고, 군대에도 군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법은 바로 율법입니다. 대학교 법학과 교수들과 변호사, 검사, 판사들은 서기관들이면서 바리새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법이 바로 서야만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고 생각합니다. 법치국가라는 말은 옳습니다. 문명국가들은 거의 모두 이런 법에 의해서 지탱됩니다. 일인독재 왕정국가로 조롱받고 있는 북한도 원칙적으로만 말하면 법치국가입니다. 그들 나름의 법으로 북한 체제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법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지는 별로 확실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는 평등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불평등한 일들이 많습니다. 요즘 사법개혁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국회 법사소위와 본회의에서 통과된 형사소송법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검사장 급의 검사들이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검찰의 권위는 지금 땅에 떨어졌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기관이 너무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게 사법개혁의 핵심입니다. 법은 이처럼 양날의 검입니다. 정의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율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할 율법이 오히려 사람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야 할 율법이 오히려 불의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평생 율법을 지킨 사람입니다. 자기를 가리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10) 율법의 요구 앞에서 인간은 절망에 빠진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안식일을 지키라는 법이 있다고 합시다. 그걸 지켜야만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안식일을 지키지 못했으면 전체를 못 지킨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죄책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안식일을 돈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세요. 돈이 많아야만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오늘 현대인들에게 율법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돈은 있다가 없기도 합니다. 결국 돈 때문에 삶이 파괴되고 마는 겁니다. 사람이 원천적으로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는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율법이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율법은 생명을 살리는 규범들입니다. 지금도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율법과 법은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한계가 있는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죄이고, 거기서 사람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됩니다. 이런 인간의 실존을 가리켜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누가 건져냅니까? 바울은 25a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대답은 바울이 로마서 앞부분에서 다 말한 것입니다.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는 복음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율법은 의에 대한 문제입니다. 의로움을 얻어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사람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건 바울의 실제적인 신앙 경험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의로워졌다고 말합니다.(롬 6장) 불가능한 율법을 지키려는 수고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수고한 대가로 의로워지는 게 아니라 단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정의롭지 않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면 그동안 율법을 지키려고 수고한 이들의 손해는 어떻게 보상받느냐고 말입니다. 노력한 것만큼 반대급부를 받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전히 율법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노력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공짜로 숨 쉬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모두 은총입니다. 이 세상의 생명 현상을 조금이라도 눈치 채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잘나서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바울은 자신의 실존이 곤고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감사하리라’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죄의 법
여기까지는 우리가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25b절이 이상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미 결론을 다 내린 상태에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듯이 말합니다. 죄의 법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지만 여전히 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고통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걸까요? 글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문장은 알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실존을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두 세계를 함께 살아갑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이고, 죄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 두 법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혼란을 느끼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기만 하면 죄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가능하면 죄의 법을 죽이고 하나님의 법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살기 때문에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고, 당연히 섬겨야 합니다. 죄에 빠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의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동과 교육의 문제를 하나님의 법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해방과 인간 교육이라는 큰 방향은 말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질서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성 문제도 그렇습니다. 청교도들은 금욕주의를 바른 성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그것 자체의 질서에 따라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 순간이 투쟁적입니다.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죄의 법을 섬기는 것입니다. “감사하리로다.” 하고 찬송을 부르는 사람도 죄의 법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 가지 법의 세계에 참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입니다. 두 세계에서 긴장하면서 삽니다. 그 긴장을 벗어날 수 있으려니, 기대하지 마십시오.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벗어나서도 안 됩니다. 특히 죄의 법을 섬기는 것 때문에 갈등을 겪을 겁니다. 거기서 실수도 할 겁니다. 죽을 때까지 투쟁하게 될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거기에 구태의연하게 길들여지면 안 됩니다. 우리 삶의 한 축인 죄의 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투쟁하며 살아가십시오.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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