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439PDgPfsnA?si=7C_QSO7W-l4uvvK9
▣ 들어가는 말
- 내가 보지 못한 건… 바람이었소.
“남을 밟고서라도 머리가 되려는 자들과 파렴치한 살생도 거리낌 없이 행할만한 자들을 골라내거라” 영화 『관상』에서 병약한 문종이 어린 세자 단종을 걱정하며, 천재 관상가 김내경에게 부탁한 말입니다. 그 애타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내경은 수양대군의 권모술수에 휘둘려 반역을 막지 못하고 불쌍한 아들마저 화를 당하고 말지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회한에 찬 내경이 바다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사람의 관상만 보았지, 시대를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인데 말이요.” 그는 평생 사람의 얼굴로 그들의 운명을 읽어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깨닫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얼굴이 아니라, 바람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의 말은 신앙의 본질과 닮아있습니다. 김내경이 ‘바람’을 보지 못한 것이 자신과 그 시대의 비극이었다면, 신앙인이 ‘성령의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혼의 비극입니다.
- 왜 바람인가?
히브리 신앙에서 하나님은 “볼 수 없는 분” “이름조차 완전하게 발음할 수 없는 분”입니다. “루아흐” 즉, 바람, 숨, 영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비형상성’ 즉, 형상을 가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상징이지요. 다시 말해서 신은 “포착될 수 없는 존재”, 곧 인간의 개념이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떤 형상으로도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신명기 4:15~18) 이것은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을 막는 근원적 조치입니다.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을 형상화”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형식이나, 형태, 이미지로 만드는 것, 우리의 틀 안에 가두는 것, 우리의 인식 속에 고정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성경이 신을 바람으로 표현된 이유는, 신은 결코 인간의 통제 아래 둘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언제 시작되고 언제 사그라지는지 알 수 없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초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지요.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거룩한 바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지요.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서,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을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 바람, 하나님의 존재 방식
- 창조의 바람
성령을 표현하는 단어, ‘루아흐(רוּחַ)’의 본래 의미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고대 근동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공기의 움직임’, 즉 ‘숨결’이나 ‘바람’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혼돈을 상징하는 물/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는 영/바람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생명과 질서의 영,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시키는 생명과 질서의 힘 바람입니다. 세상은 아직 형태가 없고 어두웠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움직이는 순간, 혼돈 속에 질서가 생기고, 죽음 속에 생명이 움텄습니다. ‘루아흐’는 창조의 첫 숨결이며, 무(無) 위에 생명을 세우는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위에 ‘운행’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아도, 그분의 바람은 지금도 세상을 흔들고, 새로운 창조를 하는 것이지요.
에스겔 37장에서 골짜기에 가득한 마른 뼈들이 ‘생기’를 통해 살아납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여기의 ‘생기’ 역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즉, 루아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를 일으키는 힘입니다. ‘큰 군대’라는 표현은 그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 생명의 바람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코에 생기(루아흐)를 불어넣습니다. 그 생기, 곧 루아흐는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 속으로 들어온 사건입니다. 흙으로 빚은 인간이 하나님의 숨을 받자,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때 인간은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숨을 품은 존재가 됩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호흡’과 연결됩니다. 우리의 호흡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루아흐의 흔적이라면, 숨 쉬는 순간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시 150:6)
바람은 한 사람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이를 흐르며 관계를 일으키는 힘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나’라는 개인의 영성을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호흡으로 불어옵니다. 오순절의 급하고 강한 바람이 그랬듯, 그 바람은 모두를 하나로 묶는 힘이 있습니다.
신정통주의 4대 신학자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위르겐 몰트만은 『생명의 영』에서, “성령은 단지 신앙인들의 내면에 머무는 영인가, 아니면 모든 생명과 존재를 살게 하는 우주의 숨결인가?”라고 질문합니다. 그 대답은 명확하지요. 성령은 단지 교회의 영(spirit of the church)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의 영(spirit of life)입니다. 그는 성령을 “창조적 에너지, 살리는 숨결, 생명 자체의 내재적 힘”으로 설명합니다. 즉, 성령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식물, 동물, 자연, 우주 전체를 살아 있게 하는 근원적 호흡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 안에 호흡하시는 창조적 생명의 숨결이다.”(몰트만, 『생명의 영』)
성경에서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드러내는 은유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숨, 영’을 동시에 뜻하고, 헬라어 ‘프뉴마’ 또한 ‘공기, 호흡, 성령’을 함께 의미합니다. 시편 104편은 말합니다. “주의 영(루아흐)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하나님의 바람은 창조의 시작이자, 지속적인 갱신의 힘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곧 “새로운 바람을 맞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그 바람이 불면 인간의 닫힌 세계가 열리고, 죽은 영혼이 다시 숨을 쉽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너는 바람을 붙잡을 수 없지만, 바람이 너를 움직일 때, 그때 너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 해방의 바람
몰트만은 성령을 “해방의 영”으로도 부릅니다. 성령은 인간을 단지 죄로부터 구원할 뿐 아니라, 억압, 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역사적, 사회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성령은 삶을 파괴하는 모든 힘에 맞서 싸우며, 인간을 자유케 한다.” 그는 바울이 말하는 ‘영과 육’의 대립을 단순히 육체의 욕심에 대한 양심의 싸움 정도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억누르는 구조와 생명을 살리는 힘”의 대립으로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육’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생명을 억압하는 모든 불의, 차별, 고통 등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영’은 종교적인 차원이나 개인의 양심이나 영혼의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해방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생명을 억누르는 어둠의 힘, 죽음의 힘을 거부하고 물리치는 거룩한 영입니다. 성령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어떠한 차별과 불의, 편견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지요.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자국민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나이의 많고 적음, 종교의 차이, 이념의 차이… 셀 수없이 많은 우리 안의 차별과 편견, 억압에 저항해야 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4:18) 예수의 공생애 선언은 곧 성령의 해방 선언입니다. 성령은 단지 영적 구원만이 아니라, 사회적 억압, 인간의 불의, 존재의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오는 능동적 힘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의 본질은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존재를 얽매는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는 생명의 자유입니다.
▣ 바람을 보는가?
- 바람을 보는 눈 : 사랑과 고요의 감각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바람과 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지요. 장자는 “보지 않고 느낀다”라는 지혜를 일찍이 이야기했습니다. 『장자』에 유명한 ‘포정해우(庖丁解牛)’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리사 포정이 임금 앞에서 소를 잡는데, 그의 칼 놀림이 마치 춤과 같았지요. 임금이 놀라서 “그대의 기술은 어찌 그리 신묘한가?” 묻자, 포정은 이렇게 답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도(道)입니다. 저는 눈으로 보지 않고, 영(神)으로 느낍니다.” 포정의 칼은 억지로 베지 않습니다. 그는 살과 뼈 사이의 ‘결’을 따라 칼을 놀립니다. 보이지 않는 결의 리듬을 따르는 순간,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보려는’ 눈이 아니라, 그분의 바람이 스치는 결을 느끼는 영혼이 필요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도다”(요 20:29). 성령의 사람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듣고, 영으로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시몬 베유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분의 무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이다.” 사랑은 바람과 같습니다. 붙잡을 수 없고, 증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불어오면, 나를 스치면 모든 것이 변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눈은 바로 그 사랑의 감각, 고요 속에서 깨어 있는 감수성입니다. 눈이 아니라, 귀로 듣고, 마음으로 감지하는 신적 현존입니다. 루아흐는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사건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마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안을 스쳐 가는 관계’로 오십니다. 열왕기상 19:11–12에 보면,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고, 지진이나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으며, “세미한 소리”로 경험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찾을 때 폭풍, 지진, 불 속에서는 그분을 만나지 못하지만,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외적 힘이 아니라 내면의 고요한 울림으로 임하신다는 선언 아닐까요. 아무도 듣지 못하는 내 안의 깊은 내면에서, 침묵과 고요 속에서 들리는 미세한 울림 말입니다.
- ‘관계적 존재’로서의 하나님
바람은 항상 ‘사이’를 흐릅니다. 하늘과 땅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숨과 숨 사이를 잇죠. 루아흐 하나님은 사람을 향해 다가오시며, 관계를 일으키시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단지 내면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을 흐르게 하는 바람으로 묘사됩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 2:2) 하나님의 영이 ‘각 사람 안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모두 사이’에 불어온 것이지요.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공동체적 바람의 사건입니다. 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사이와 함께 흐르는 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루아흐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숨 쉬는 생명의 호흡으로 경험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하늘에 두지 않고, ‘우리 사이에 계신 분’으로 이해합니다. 바람은 공간을 메우며 ‘사이’를 연결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나와 타자 사이의 숨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결국,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은 곧 성령의 바람의 가시화이지요.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고, 붙잡을 수 없지만 존재를 움직입니다.
▣ 나가는 말
- 바람이 보이십니까?
“내가 보지 못한 건… 바람이었소”라는 내경의 고백은 뒤집어보면, 이제는 비로소 바람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아닐까요. 바람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고백할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신앙은 결국 내가 ‘알지 못한다.’ ‘보지 못한다.’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보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보게 되는 것. 그것이 믿음의 눈뜸입니다.
- 바람과 함께 춤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신앙이란 ‘잡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고 느껴지는 하나님의 움직임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분의 루아흐는 언제나 자유롭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어옵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흔들리듯, 하나님의 영이 오면 우리 마음이 깨어납니다. 루아흐는 여전히 이 땅 위를 지나가며, 죽은 영혼에 생명을, 닫힌 마음에 빛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자신을 그 바람의 길 위에 세우는 사람입니다. 멈춰 있지 않고, 닫혀 있지 않고, 하나님이 불어오시는 방향으로 자신을 열어놓는 존재, 그것이 ‘성령 안에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바람과 함께 춤추는 삶이길 바라봅니다. 신앙은 바람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그 바람의 리듬에 발을 맞추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쪽으로, 그분의 숨결이 향하는 곳으로, 내 삶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람과 함께 춤추는’ 믿음입니다.
생명의 바람, 자유의 바람, 평화의 바람이신 주님,
루아흐, 주님의 바람이 내 안에 불어오게 하소서.
내가 다시 살아 움직이고,
고요한 음성 속에서도 당신의 숨결을 느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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