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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부조리 앞에서… (시 22 : 1 - 21)

2025년 11월 23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oZGUv-ZX11I?si=Enb3eXgvauV6mKq_

 

▣ 들어가는 말

- 낯선 자

가을은 고독에 빠지고 뭔가 감성적인 계절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철학하기, 신학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이 늦가을에 신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시죠. “분명 내 것인 이 마음 자체도 나에게는 영원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남게 될 터.” … “영원토록, 나는 내 자신에게 낯선 자로 남게 되리라.”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의 구절입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경험이 쌓여가면, 삶이 무엇인지 알 법도 한데, 정말이지 삶은 알다가도 모를 아주 묘한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삶은 더 복잡하고 어렵고, 심지어 나 자신마저 더 알 수 없는 낯선 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무엇 하나라도 ‘나는 그것을 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소크라테스) 그러기에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낯선 것이고, 또 그래서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것이지요.

 

- “지루함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무게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고난이 찾아온 것도 아니고, 큰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문득 모든 것이 낯설고, 공허하고, 무의미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 날, 출근길 차 창밖을 바라보며 “왜 그럴까, 왜 이렇게 아무 느낌이 없을까.” 스스로 묻게 되는 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정적만 가득한 날, 기도하지만 어떤 대답도 기대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 그 지루함과 무거운 침묵의 순간을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의 문이 열리는 자리’라고 말했습니다. 삶에 분명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인간과 그 의미를 설명해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자리 말입니다.

전후 독일을 배경으로 한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가난한 부부 프레드와 캐테를 통해 전쟁 이후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가난, 주거 문제, 실업 등 절망 속에서 서로를 지탱할 힘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것 외에 어떤 의미도, 어떤 감동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을 살아가지요.

사실, 이 지루함과 침묵의 시간은 사실 우리 모두가 통과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사람들도 이 길을 지났습니다. 시편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22:1)라고 절규했던 다윗도,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욥30:20) 부르짖었으나 대답이 없다고 토로하던 욥도,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신의 침묵이라는 어둠을 지나가던 예수도 모두 이 부조리의 밤을 겪습니다. 성경은 침묵을 통과하지 않은 믿음을 신앙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조리, 침묵, 의미 상실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하는 아주 오래된, 여전히 살아있는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어쩌면, 신앙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그 순간,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지루함과 침묵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다시 살아갈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 어느 날, 부조리가 찾아온다!

카뮈는 말합니다. “부조리는 인간의 의미 요구와 세계의 침묵이 충돌할 때 탄생한다.”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와 똑같고, 일, 관계, 사랑, 신앙 어떤 것도 더 이상 감흥이 오지 않는 경험. 카뮈에게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입니다. 세계는 설명하지 않고, 대답해 주지 않고, 우리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침묵 앞에서 인간은 결국 세 가지 선택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부조리를 끝내려는 파괴적 선택으로 ‘자살’하거나, 신이나 초월에 숨는 자기기만으로 ‘철학적 도피’, 부조리를 인정하고 살아내는 ‘반항의 삶’. 카뮈는 세 번째 길을 선택하지요. 의미가 없다고 해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음을 직면하면서도 걸어가는 것. 이 길은, 사실 성경이 오래전부터 알려준 길과 닮아있습니다.

카뮈는 인간이 부조리를 만나는 순간을 거대한 고통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틈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부조리는 어느 날 아침 면도하다가 갑자기 찾아온다.” 삶은 계속되고, 늘 하던 대로 밥을 먹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든 일상이 이유 없이 낯설어집니다. 말하자면, 삶을 의미 있게 지탱하던 보이지 않는 끈이 순간적으로 “뚝” 끊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지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평범한 직장인 그레고르 잠자가 말도 안 되는 곤충으로 변해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카프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실제 변신이라기보다, “설명할 수 없는 일상의 파괴”입니다. 변신의 원인도, 이유도, 의미도 알 수 없습니다. 이 부조리한 상황은 세계가 더 이상 나에게 논리나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카프카와 카뮈가 만나는 지점은 이것입니다. 세계는 설명하지 않는다. 의미는 인간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기계처럼 돌아가던 삶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부조리는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의미와 목적을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눈을 뜨니 이미 세계 한복판에 ‘던져져’ 있고, 왜 여기 있는지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게도 부조리는 거대한 비극이나 철학적 고민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그때 우리는 세계-내-존재임을 깨닫는다.” 카뮈의 부조리와 하이데거의 피투성은 둘 다 인간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던져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카뮈 이전에 ‘지루함’을 가장 깊이 사유한 사람은 키르케고르입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루함은 영혼의 질병이다.” 지루함은 단순한 무료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며, 삶의 의미가 보이지 않을 때 찾아오는 “내적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도록 요구받는데 이를 회피할수록 삶은 무기력해지고 공허해진다는 것이지요.

 

정리하자면 일상의 지루함, 말이 사라진 침묵, 설명되지 않는 낯섦, 불현듯 찾아오는 공허함…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우리를 찾아옵니다. 이것은 카뮈나 문학, 철학이 말하는 부조리의 문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의 언어로는 “하나님의 침묵”, 시편의 언어로는 “탄식”, 신학 언어로 “성숙의 밤”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 부조리 : 신의 침묵

성경은 신앙인의 삶에 침묵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의 침묵을 통해 신앙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 대답 없는 하나님을 향해 외쳤습니다. 다윗은 탄식하며 “왜 숨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였습니다. 신의 침묵은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부재 경험, 실존적으로는 부조리의 체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부재는 그분의 부재가 아니라, 우리를 더 깊은 자리로 이끄시는 신비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때로 말씀 대신 침묵하십니다. 빛 대신 그림자를 허락하십니다. 이유 대신 기다림을 남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진짜 믿음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이 “침묵의 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카뮈가 말한 부조리(Absurd)란, “의미를 바라는 인간”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세계” 사이의 간극입니다. 그런데 이 간극은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침묵’, 또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경험’과 같은 것이지요. 성경은 이 침묵의 경험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가장 깊은 지점에서 이 침묵이 등장합니다.

고난의 한가운데서 욥은 말합니다.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욥 30:20) 욥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진실하고 정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하던 모든 것을 잃고 자기 육체는 고통에 찢겨 지며, 세상은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욥의 침묵 체험은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핵심과 닮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욥은 질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이 침묵은 욥에게 버림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이끄는 통로였습니다.

시편의 절반 이상이 탄식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이 질문은 카뮈가 부조리를 발견하며 던진 질문, 뵐이 전후의 암울한 시대에 던진 질문과 같습니다.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다윗은 침묵하는 하나님, 대답하지 않는 현실, 설명되지 않는 운명 앞에서 절규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규는 신앙의 시작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것은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신앙의 절반은 ‘왜?’라고 묻는 일인 것입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카뮈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삶은 설명되지 않는다.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전도서는 부조리를 신학적 언어로 번역한 책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노력해도 보상이 명확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결국 같은 운명을 맞는다는 사실… 전도자는 침묵하는 세상과 끝없는 반복 속의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허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다시 찾습니다.

신의 침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여기서 우리는 부조리와 신의 침묵이 교차하는 가장 깊은 자리를 봅니다. 의로우신 분이 고난을 당하고, 사랑의 하나님이 침묵하고, 사랑이 버려짐을 당하는 장면. 이 사건은 어떤 철학자보다도 어떤 문학 작품보다도 더 강렬한 부조리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부조리를 부활의 영광으로 뒤집어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림이 아니라, 잠시 감춰진 임재 방식이었습니다. 몰트만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 속으로 침잠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임재 방식이다.”

신의 침묵은 부조리의 신학적 표현이지만, 결코 절망의 끝이 아닙니다. 카뮈에게서 부조리는 영구적 조건이지만, 신학에서 침묵은 새로운 계시를 위한 공간, 영혼의 성숙을 위한 준비, 하나님의 더 깊은 임재가 숨겨진 장소입니다. 부조리는 인간을 절망 속에 멈춰 세우지만, 신의 침묵은 인간을 하나님의 더 깊은 자리로 초대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잠잠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잠잠함… 침묵… 응답 없음… 그 공간 속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신학은 그 침묵을 절망의 표시가 아니라, 신비의 시작으로 해석합니다. 카뮈에게 부조리는 인생의 조건이지만, 성경에서 침묵은 하나님이 가장 깊이 일하시는 장소입니다.

 

▣ 침묵 속에서도 이어지는 작은 연대

카뮈가 철학적으로 말한 부조리와 침묵은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전후 가난한 부부의 삶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작품의 바탕에는 전쟁 이후의 극심한 가난과 피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뵐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전쟁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 남긴 정서적 황폐함입니다. 전쟁이 남겼다기보단, 이미 있었던 것인데, 전쟁이 감추어있었던 것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프레드와 캐테는 부잣집 단칸방에 얹혀살며 가난한 자들을 향한 안주인의 은근한 혐오와 전쟁 후 도시를 덮은 피로와 침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아이들 역시 떠들 능력조차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전쟁은 건물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감정도 무너뜨렸습니다. 프레드는 이런 삶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와 떠돌며 일하지만, 그가 번 돈 대부분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냅니다. 삶을 버틴다는 느낌보다, 그저 의미 없이 떠밀려가는 듯한 실존적 무기력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카뮈가 말한 “세계의 침묵”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프레드는 돈을 빌려 아내 캐테와 단 하루라도 함께 보내기 위해 애씁니다. 마지막으로 성당 신부에게 돈을 빌려 두 사람은 만나고, 아이들을 두고 왔다는 죄책감 속에서도 캐테는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나섭니다. 싸구려 호텔방에서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러나 그런 힘겨운 만남은 오히려 서로의 마음에 더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사랑은 있으나, 그 사랑이 현실의 무게를 지탱할 힘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그 밤을 마지막으로 이별하게 되지요. 뵐은 이 장면에서 “관계는 이렇게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 보입니다. 전후의 절망과 침묵은 이 부부를 더 이상 함께 있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프레드는 거리에서 우연히 캐테를 봅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곧 그녀임을 깨닫고,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이 마음 깊은 곳에서 깨어납니다. 이 감동은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무너진 인간의 마음이 다시 “살아 있음”을 기억하는 조용한 울림입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신부가 말합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보게.” 프레드가 대답합니다. “집에 가봐야지요.” 이 말은 결심이라기보다 속삭임입니다. 큰 변화도 아니고, 극적인 각성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말은 그가 다시 캐테에게, 지루함을 넘어 사랑으로,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적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돌아섬, 회심입니다. 성경은 감동이 아니라 ‘돌아섬’을 말합니다. 침묵과 부조리 속에서도 다시 삶을 선택하려는 작은 결단입니다. 말이 아니라 걸음으로 사랑을 택하는 조용한 반항이자, 신학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믿음의 첫걸음입니다. 뵐이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가난과 침묵 속에서도 사람은 다시 감동하고, 다시 걸음을 떼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카뮈의 부조리와 십자가의 침묵, 그리고 뵐의 소설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작은 은총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 나가는 말 - “침묵 속에서 다시 들리는 하나님의 숨결”

신앙의 길은 큰 기적이나 거대한 음성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카뮈가 말한 부조리, 뵐이 보여준 침묵, 시편과 욥기가 말한 탄식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에 늘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적혀 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신앙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침묵 뒤의 하나님은 버린 하나님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하나님입니다. 부조리 속에서도 계속 살아내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가장 조용하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숨결을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부조리와 침묵 속에서라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기로 결단할 때, 그 자리가 바로 부활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작은 돌아섬은 우리 삶의 모든 구조를 다시 일으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집에 가봐야지요.”

 

“말씀하시지 않는 하나님,

침묵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부조리처럼 느껴지는 삶 속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다시 의미를 일으키게 하소서.

작은 사랑, 작은 연대, 작은 희망을 통해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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