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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 25:31-46)

마지막 심판과 생명 완성

마태복음 25:31-46, 창조절 열한 번째 주일, 2011년 11월13일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종말과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26-28장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진술입니다. 마태복음의 이 마지막 부분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세계를 심판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언입니다. 특히 25장에는 심판에 대한 세 비유가 나옵니다. 1-13절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슬기로운 다섯 처녀 비유이고, 14-30절은 그 유명한 달란트의 비유이며, 오늘 설교 본문인 31-46절은 앙과 염소에 대한 비유입니다. 각각 비유의 마지막 구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첫째 비유에서는 졸다가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들에게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이 주어집니다.(25:13) 둘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종을 향해서 주인은 이렇게 책망합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5:30) 셋째 비유에서의 마지막 진술은 영벌과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25:46)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고 의인은 영생에 들어갑니다. 이 세 비유 모두 심판을 주제로 합니다. 그냥 심판이 아니라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마지막 심판입니다. 각각의 비유가 나름으로 특징이 있지만 마지막 비유는 유별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본문은 31절에서 ‘인자’가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의 보좌에 앉는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인자는 세상의 마지막 때 오실 심판자를 가리키는 유대 묵시적 용어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위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34절에서는 그 인자가 임금으로 묘사됩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부류로 심판을 받습니다. 오른 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될 의인들입니다. 그들이 의인으로 분류된 이유는 임금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 어려운 처지가 여섯 가지로 나옵니다. 주림, 목마름, 나그네, 헐벗음, 병듦, 옥에 갇힘이 그것입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37-39절) 이때 임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 뒤로 악인에 대한 심판도 이런 대화로 이어집니다. 45절은 이렇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작은 자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문제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누구인가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을 가리킵니다. 작은 자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여섯 항목을 보십시오. 모두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과 동일시했다고 암시하는 구절이 신약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마 10:42절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소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메시아 관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에는 메시아가 ‘비천한 자를 높이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고 말합니다.(눅 1:52, 53) 좀더 구체적인 언급은 예수님이 처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인용한 이사야입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사 61:1) 하는 일이 바로 메시아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 삶에서도 주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라고 했겠습니까?(눅 5:30) 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0절을 잘 읽어보십시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형제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에 복음 전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을 그게 걸맞게 대우하는 이들은 의인이고, 박해하는 이들은 악인이라는 뜻입니다. 고통을 받던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 전도자들에게 이런 말씀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옳은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구원에 대한 소식입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것을 도와주는 구제와 복지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복음 전도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일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씀(막 3:29)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본문이 말하는 작은 자가 소외된 이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제자들을 가리키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 모두에 해당된다고 봐야겠지요. 본문에서 작은 자가 누구야 하는 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을 서로 다르게 대한 이들에게 임한 심판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서 우리도 불안합니다. 과연 영생의 심판을 받을 자들인지, 아니면 영벌의 심판을 받을 자들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영생을 얻는다고 믿으면 속이 시원하지만 열광주의자들이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늘 찾아가서 도와주면서 살지 못합니다. 그런 일을 간혹 했다고 하더라도 철저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영벌의 심판을 받은 이들의 경우를 보면 더 불안합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악을 행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다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 한 것” 뿐입니다. 악을 행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 추궁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영벌을 피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칠 사람들이 있을까요?

     톨스토이의 동화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상황을 저는 자주 대합니다. 지하도나 육교를 지날 때 동냥바구니를 앞에 놓고 엎드려 있는 사람들 옆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바구니에 돈 몇 푼을 넣고 지나갈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가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동냥 받는 바로 그 사람으로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것이라면, 저는 주님을 못 본채 한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지난 11월 10일에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 동안의 크레인 농성을 끝내고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질질 끌던 한진중공업 노사협정이 타결된 결과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노동문제, 노사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김진숙 씨 행동은 불편합니다. 그렇게 까지 투쟁할 필요가 있는지, 투쟁하더라도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런 복잡한 노사문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한 여성 노동운동가가 크레인 위에서 309일 동안 농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몇몇 그럴 듯한 자기합리화로 못 본채 했다는 점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파트 관리원들에 대한 문제도 비슷합니다. 나이가 든 그분들은 그 자리마저 잃을 게 염려되어서 내년부터 법이 정한 최저생계비를 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기업체의 비정규 직원이나 대학교 시간강사들의 삶도, 교회 부교역자들의 삶도 위태롭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못 본채 하고 지나칩니다.

 

     배타적 심판 행위

     오해는 마십시오. 오늘 설교 본문은 우리를 도덕적인 불안감에 빠지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본문을 잘 보십시오.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과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은 그런 결과를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께서 주린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영벌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그 반대의 말을 했습니다. 그들은 작은 자에 대한 태도가 바로 주님을 향한 태도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인자이며 임금이신 주님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준으로 이들을 판단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마지막 심판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심판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고, 심판을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창조행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배타적인 행위입니다.

     이런 문제를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마지막 심판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들은 마지막 심판을 선정적으로 대합니다. 영원한 형벌, 유황불, 구더기를 연상시킵니다. 그런 영벌 앞에서 신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오해입니다. 심판은 생명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심판은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첫 비유에서 천국을 혼인잔치라고 한 것도 심판이 생명완성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생명을 파괴하는 힘들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들은 영벌에 들어가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생명을 파괴하는 요소가 남아있다면 그것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사건이 바로 마지막 심판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때 생명을 파괴하는 악한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십니다. 그 악한 세력이 거해야 할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마지막 때 지금 허약하기 짝이 없는, 늘 죽음에 노출된 생명을 완전한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그분의 고유한 능력으로, 그분의 배타적 능력으로 그것을 행하십니다. 아무도 거기에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25장의 첫 비유에서 잔치 주인은 뒤늦게 온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셨고, 둘째 비유에서 무책임한 한 달란트의 사람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완성인 마지막 심판이 하나님의 배타적 능력만으로 이뤄진다면 사람이 할 일은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자이신 주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일반 법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검사와 변호가 많은 말을 하지만 결국 판결은 법관이 내립니다. 마지막 심판에서 주님은 법원의 법관과 같습니다. 그와의 관계가 생명을 얻는데 절대적인, 궁극적인 기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 완성의 근원입니다.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25장에 함께 나오는 두 비유를 보십시오. 잔치에 참여한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위임받은 종들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서 자신들의 책임을 다 감당했습니다. 처녀들은 기름을 통해서 잔치 주인과 참된 관계를 맺었고, 종들은 달란트를 통해서 주인과 참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오늘 설교본문에서는 작은 자를 돌보는 일을 통해서 주님과의 참된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이 완성될 그 순간을 기다리시나요?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시나요? 지금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아는 사람에게만 그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방식으로 이루실 생명 완성의 순간을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기다리십시오. 마지막 심판으로 이뤄질 그 순간은 잔치와 같습니다. 그 순간은 두 배로 받은 달란트와 같습니다. 그 순간은 새로운 생명인 영생의 카이로스이며 파루시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마 약속하신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를 안다면 오늘의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십시오.

마태복음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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