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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물을 길어 부어 보자 (눅10:25-27, 약 4:13-17,삼상 7: 3-6)

2025년 2월 9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QmJNkJm-rQM?si=k5ynYoAG9osWleJF

 

오늘 말씀을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되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이기에 주전 1100여년전에 일어난 사건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이 없던 이스라엘 나라에 있었던 사무엘은 사사라는 재판관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로 그리고 예언자로 활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접해 있던 강대국 블레셋은 오늘의 팔레스타인의 옛나라인데 이스라엘을 침략할 계획을 이미짜놓은 상태였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위기의 순간에 사무엘은 전쟁도 전쟁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라고 보았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동족들을 바라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겉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으나 속 모습은 모두 다 풍요의 남성 신 바알과 풍요의 여신 아스다롯이라고 하는 앗세라 신들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I

동서남북 사방이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었던 이스라엘 나라를 이끌어간다는 것 그리고 인접해 있는 강대국 블레셋(팔레스타인)이 은 곧 침략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사무엘은 주위의 다른 강대국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최우선으로 선택한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풍요와 부요함을 주는 바알과 앗세라와 같은 이단 신앙과, 무속신앙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앗세라라고 하는 우상의 포로가 되어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화려한 생활과 풍요로운 생활 그리고 성적 쾌락에만 최고의 가치를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동족들을 향하여 철저하게 영혼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뉘우치고 뉘우쳐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라고 엄중하게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기의 순간에서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서 바알과 앗세라 신상을 다 제거하였다고 합니다. 사무엘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면서 하나님 신앙으로 출발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모이게 하였고 사무엘은 “하나님 의지신앙”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강대국 블레셋이란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급박한 위기의 상황에서 결코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은 블레셋을 물리칠 방법이란 전쟁을 위해 최상의 무기를 준비하거나 다른 나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직전 가장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은 물질만 바라보고 살아갔던 이기적인 삶을 청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 후, 온마음-온몸 다해 야훼 하나님을 섬기면서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모두가 함께 행복해하는, 아름다운 민족공동체를 이루어나가자고 말씀하셨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이때 사무엘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길어 오게 합니다. 각자 물을 길어 오게 했는지 대표로 몇 사람에게 물을 길어 오게 했는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사무엘은 땀흘려 우물로 가서 길어 온 물을 성전에 쏟아버리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II

저는 개인적으로 틀에 박힌 예배와 찬송보다는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예배에 관심이 많기에 “물을 길어 와서 제단에 물을 붓고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무엘의 예배”에 관심이 많기에 물을 제단에 부어버린 것에 중점을 두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본분 외에 “물을 긷는다” 혹은 “마음을 물처럼 쏟는다”는 말씀이나 “성전에서 물이 흘러 온 세상으로 나가 생명을 풍성스럽게 하고 치유한다”는 말씀이 각각 예언자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와 그리고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도 잠시 나타납니다.

먼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전에는 우리들에게 노하시면서 책망하셨으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노를 거두시고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시며 우리의 기쁨이 되어주신다고 강조하면서 이사야 12장 3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때 물을 긷는다는 것은 기쁨의 극치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남달랐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자신의 동족을 향하여 “네 마음을 하나님께 물 붓듯 하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애가 2장 19절에서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쏜 듯할지어다.”

예레미야가 강조한 “밤 초경”은 해가 질 무렵부터 밤 10시까지를 말하는데 이는 해가 금방 진 상태이므로 하루 가운데 가장 어두운 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자신이 처한 암흑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물을 붓듯 마음을 쏟아놓으라고 합니다. 이는 슬픔과 애통함을 뜻하는 예레미야의 독특한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을 찾아보더라도 물을 길어 온 후에 그 물을 바닥에 붓고서 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취한 예배, 물을 성전 바닥에 부어버린 예배의식은 상징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외국의 신들을 하나님보다 더 잘 섬기며 따랐던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고 인접해 있던 강대국 나라를 하나님보다 더 의존했던 반신앙적인 모든 삶들을 철저하게 끊어버리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집중하고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리는 일에 온 몸과 온 삶을 쏟으라고 하는 상징적인 뜻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마음을 쏟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무엘 당시 이스라엘 사회와 정치 지도자들은 강대국 블레셋이란 나라에 의해 조정되었고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이방신들과 함께 이방의 나라 블레셋이라고 하는 외세의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만 참되게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강대국 블레셋 나라가 침입해오는 절박한 전쟁의 상황에서 그들에게 물을 길어 와서 성전에 물을 붓게 하는 사무엘의 예배를 통해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앞에 어떠한 상황이 임해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건한 신앙으로 바알과 앗세라에 벗어나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는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에 물을 붓게 하는 예배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예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는 모두가 함께 하나가 되고 모두가 함께 아파해주고 모두가 함께 위로해주며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나가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게한 것입니다. 내가 있기에 당신이 있고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다고 하는 공동체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바르게 일고 남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되찾아 그 사명을 향해 최선을 다하게 하는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물을 붓게 하는 사무엘의 예배는 이집트의 노예의 땅에서 해방케 헤주신 출애급의 하나님은 노예의 땅 이집트에서 생명을 지켜주신 생명의 하나님을 고백하게 한 것입니다, 40여년간의 뜨거운 사막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쌀쌀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해주신 구원의 하나님을 깨닫게 하여 모든 공동체가 모두가 함께 즐겁고, 모두가 함께 만족하고 모두가 함깨 행복해하며 약자가 보호받는 하나님 바라시는 새롭게 꿈꾸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측해 보면 사무엘이 인도한 예배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였고 위기의 순간마다 해방시켜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헤에 감사하는 예배였고 감동이 넘친 예배였으며 용기와 희망과 새힘을 얻게 한 예배였으리하 짐작합니다. 성서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새로와진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셔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III

이제 저는 바알과 앗세라 혹은 아스다롯의 현대적 의미를 찾아본 후 오늘날 어떤 모습이 바알과 앗세라의 모습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알신은 고대 문명의 중심지 중에 하나였던 페니키아 땅,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 지역의 중심 신이었습니다. 바알은 당시 농경시대에 가장 필요한 농사의 신이며 천둥을 그치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여 많은 결실을 맺게 하기에 다산, 풍요의 신이요 복의 신이었습니다. 

바알 신의 아내인 앗세라 혹은 아스다롯(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다른 신이지만 뿌리가 같고, 종종 같은 신으로 묘사됨)은 바알과 결합하여 다산, 풍요,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특히 바알과 앗세라 두 신들을 언급할 때는 두 신들의 성적인 결합을 통해 다산과 풍요를 가져온다고 믿어 고대 페니키아 사람들은 성적문란과 타락이 만연하였다고 합나다.

그렇기에 사무앨보다 300여년 후의 예언자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을 따르는 선지자 850명과 한판 승부를 겨루어 모두를 죽게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왕상 18:40)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 욍국은 주전 722년 멸망하게 되는데 멸망의 주요 요인은 물질적인 풍요와 부(富) 그리고 탐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바알과 앗세라”라고 하는 신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라고 성서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알과 앗세라”의 현대적 의미는 물질적인 풍요와 부(富) 그리고 탐욕이라고 하는 물질 지상주의 곧 맘몬이라는 전지전능한 물질이 주는 행복에 도취해 있는 사람들을 일컬어서 물질신 곧 맘몬(Mammon god)을 숭배하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전 세계 속에 자리하고 있는 바알과 앗세라와 같은 모습은 40여년전 영국의 데쳐 수상과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함개 결정한 경제정책 곧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 정책 속에 바알과 앗세라의 내용들이 너무 많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라고 하는 것은 1974년 노밸경제학상을 받았던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창한 경제정책을 말합니다. 그가 말한 신자유주의 경제란 온 세계가 시장의 무한한 개방과 경쟁을 통하여 무한한 성장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면 어떤 것괴도 견줄 수 없는 최상의 즐거움과 행복을 줄 수 있기에 하나님 없이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사회정의, 평등, 평화, 사랑과 나눔,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기독교 가치관은 “미신”이요 “사이비와 같은 종교”이며 그리고 “자유 문명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요 “방햇거리”라고 말한 바있습니다.

그렇기에 불평등의 문제, 비인간화의 문제, 약자의 인권.문제 난민의 문제와 책임윤리 그리고 세계의 평화 같은 기독교적 가치관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의 세계 경제구조는 마음껏 시장을 개방하게 하여 최대한의 이익을 쟁취하여 오직 자국의 발전과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맘몬니즘에 푹 젖어 있는 현대판 바알과 앗세라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세계화를 제일 앞장서서 주도해 나가는 나라는 단연 미국이며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국의 이익을 타국을 짖밟아버리거나 전쟁도 불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무엘 예언자가 오늘 여기에 있다면 오늘의 경제구조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 모두가 함깨 만족하고, 모두가 함께 넉넉하고, 모두가 함께 풍요로운 세상 그러나 약자가 보호받는 만나의 신앙의 모습이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기에 바알과 앗세라의 현대판이라고 외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무엘은 이와 같은 오늘의 세상을 향하여 오늘 우리들을 향하여물을 쏟아부으며 새롭게 시작하라고 경고를 날려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최근 탄핵정국 이후에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에서 나온 종교인 선호도를 보면 불교는 57%, 가톨릭은 48%에 비해 우리 개신교는 15%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 사무엘은 한국 개신교회를 향하여 틀을 새롭게 짜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앙으로 거듭나야한다고 역설하면서 한국교회를 향하여 돌이키라고 물을 부을 것입니다.

이제 샘터교회의 우리들은 물질을 쫓아다니는 오늘의 우리 사회와 풍조와 물질에 영혼을 팔아버린 세상을 바라보면서 물을 길어 강단에 부어봅시다. 오늘 우리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향하여 무엇을 쏟아 붓기를 원하고 계실지 어떻게 할 것을 바라고 계실지 우리 모두 기도하면서 좋은 방안을 모색해 봅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우리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더욱 창조적이고 더욱 개혁적이며 더욱 실천적이 되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아름다운 교회-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우리 샘터 공동체 모두가 함께 신령한 물을 부어봅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말 못 할 기쁨과 보람이 넘칠 것이며 신앙으로 살아가는 멋과 함께 세상이 주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삶의 찐한 행복과 새 힘을 맛볼 수 있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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