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J8GSkqhUfak?si=cMeOoeJsJ9xvai8u
▣ 들어가는 말
- 무엇을 기억하는가?
“더 많은 기억이 필요했어. 더 빨리, 끊어지지 않게 기억을 이어가야 했어. …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구멍을 생각해. 그걸 쏘아 보낸 총구를 생각해. 차디찬 방아쇠를 생각해. 그걸 당긴 따뜻한 손가락을 생각해. 나를 조준한 눈을 생각해. 쏘라고 명령한 사람의 눈을 생각해.”(한강, 『소년이 온다』 중). 이 글은 마치 죽은 자가 기억해달라고, 제발 잊지 말아 달라고, 온몸이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리기 전에 하나하나의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현대사에 참 아픈, 일부러 잊어버리고 싶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공동체는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한 민족, 한 나라라는 것은 그 민족, 그 나라가 가진 공동의 역사, 공동의 기억을 기반으로 합니다. 한 교회, 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것 역시, 마땅히 함께 공유하는 고백과 사건들, 추억,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요. 그래서 이번 창립기념 주일 예배를 ‘함께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을 주제로 기획하고 있습니다.
5월이 되면 한국인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광주를 떠올리게 됩니다.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 1980년 5월의 광주로 향합니다. 그 기억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이지요. 벚꽃이 지고, 햇살이 따사로워질 무렵, 그 봄날, 꽃잎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군인들의 총과 군홧발 아래에서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외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다! 우리도 사람이다!” 그 외침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구가 아니라, 사람이 한 사람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절규였고 신음과도 같은 것이었지요.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당신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말합니다. 고통과 폭력에 노출된 타인의 얼굴은 단순히 하나의 정보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응답해야 하는 책무라는 것이지요. 5.18의 희생자들은 단지 어떤 불행한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라, 우리 한국 공동체를 향해 말없이 책임을 묻는 얼굴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얼굴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 부끄럽지만, 우리 역시 그들을 멸시했고, 외면했지요. 고통에 공감해 주지 않았고 온전히 기억해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이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었음을, 잊히고 외면당한 자리에서 인간의 상처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또 다른 예수의 모습,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음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 고난받는 하나님
- 고난받는 신
프리드리히 니체는 말합니다.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힘의 감정을, 힘에의 의지를, 힘 자체를 고양시키는 모든 것이다. 악이란 무엇인가?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힘이 증가되고 있다는 느낌, 저항을 초극했다는 느낌을 말한다.”(니체, 『안티크리스트』 중) 니체는 십자가에 달린 약하고 고통받는 신이 아닌, 불굴의 생명 의지로 삶의 문제를 극복하는 위버멘쉬(초인)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사랑이나 용서를 말하는 따위의 무기력한“신은 죽었다” 선언하며, 신 없는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합니다. 너무나 놀랍고 혁명적인 주장이지요.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삶의 마지막은 온전한 정신을 갖지 못한 비참한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 자신도 위버멘쉬의 삶을 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춤추는 영웅이 아니라, 상처받는 사랑, 함께 짐을 짊어지는 연대, 그리고 몸소 고통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기독교의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그 의미가 잊혀온 것도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 아니라, 부서짐과 침묵, 낮아짐과 고통의 상징이지요. 하나님은 하늘의 보좌가 아니라, 인간의 눈물 속으로 내려오시지요.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하에서 이렇게 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편리함이나 안락함 속에 계시지 않는다. 오직 고난 가운데 계신다. 고난 없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난과 고통을 외면하는, 영광과 승리만을 추구하는 신은 성서의 신이 아닙니다.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속으로 오시는 하나님, 그분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신, 하나님이시지요. 광주를 외면한 신이 아니라, 광주에서 함께 찢기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광주의 한복판, 눈앞에서 쓰러져가는 사람을 안고 울던 이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을 먼저 피신시켰던 어머니, 거리에서 피를 닦고 주먹밥을 나누던 사람들, 그들의 두려움과 고통과 눈물, 그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던 것이지요.
-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21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전능하고 초월적인 문제 해결사로 이해되어왔으나,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속에 실제로 동참하신다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서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인류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연대의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이 하나님을 통해 이 세계의 고난받는 사람들은 혼자가 아님을 체험하고,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당하시는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고통을 외면하는 신은 공허한 신일 뿐이며, 오직 고난의 현장으로 자신을 던지신 하나님만이 죽음과 악의 권세를 깨뜨리고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 그 책의 핵심적 주장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의 좌우편에 두 사람의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중 한 사람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비아냥거립니다. 다른 한 사람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그러니 우리는 어떤 구원의 자격도 없다. 그러나… 그저 당신의 자비, 은혜를 구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두 강도의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한계성과 죄성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는 절망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서 다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하고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방식과 삶의 의미를 부정하며, ‘내던져진 존재’(하이데거)의 삶에, 어둠과 절망의 세계 속에 매몰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모습은 저 위에서 동아줄을 내려주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한 가운데, 고통과 절망의 한 가운데서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는 하나님, 고통받고 절규하는 예수입니다. 예수는 인간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고통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인 것이지요.
- 광주, 하나의 실존적 질문
그동안 막연하게 믿어왔던 정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 성공과 풍요를 약속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끔찍한 비극 앞에서 깨어지고 맙니다. ‘신은 정의로운가?’ 신정론(神正論)은 광주의 한복판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보고 듣습니다. 이 세계에서 성공을 약속하는, 타인의 눈물과 고통을 짓밟고 위로, 저 높은 곳으로 올려주는 그 신은 거짓 신임이 드러납니다. 그런 신을 향해 우리도 “신은 죽었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 신의 침묵은 부재의 침묵이 아니라, 동행의 침묵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 외치며 절망의 가장 깊은 바닥을 경험합니다. 예수가 느낀 절망의 본질은 ‘세상은 왜 이리도 불의한가?’ ‘왜 의인이 고통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인간이 이리도 악할 수 있는가?’ ‘이렇게도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하는가?’ 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의 절망의 본질은 바로 “신의 침묵” “신의 부재”입니다. 예수의 비탄은 바로 5.18 시민들의 “왜 우리를 버리십니까?”라는 절규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깊은 어둠의 순간, 강도는 깨닫습니다. 그들 사이에 함께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모습을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못하며, 저 멀리서 바라보며 그저 ‘아이고 어떻해…’ 안타까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우리 곁에서 고통당하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부활합니다.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합니다. 광주의 아픔과 절규가 오늘 대한민국 시민들의 가슴에서 부활했음을 우리는 두 눈으로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부활을 통해, 성경은 진정한 신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공을 약속하는 우상이 아니라, 고통과 절규 속에 함께 계신 신이야말로 진정한 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집니다. 광주는 단지 한국 현대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고 응답할 것인가에 관한 실존적 물음이기도 합니다.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을 향해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의 얼굴들은 지금 우리를 응시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질문은 신앙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는가?”
- 역설적 진리
토마스 엘리엇을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비현실의 도시, 겨울 새벽 갈색 안개 속에서, 군중이 런던 다리를 건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 나는 죽음이 그렇게 많은 이들을 풀어놓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구절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나는 죽음이 이토록 많은 사람을 파괴했으리라 믿지 않았다.” 구절을 차용한 문장인데, 현대인들의 무의미한 삶, 즉 살아 있으나 이미 죽은 자처럼 살아가는 자들, 혹은 죽은 자 그 자체라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높은 곳을 향해, 더 많은 소유와 더 많은 영광을 향해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는 우리의 삶은 바벨을 쌓아 올리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 아닐까요. 성경 전체의 가장 중심, 핵심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아닌가요. 성경은 그 바벨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요. 성경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 저 비참한 곳,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라고 요청하는 것 아닐까요.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길은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길이 아니라 ‘아래로, 아래로 낮아짐의 길’이라 말하는 것 아닐까요.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3~5)
오늘 본문의 말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는 표현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지난번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무고한 이가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은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놀라운 신비, 역설적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래서 고통과 고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오히려 그길로 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구절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연대를 드러냅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며, 함께 상처받으시며, 그 상처로 치유가 임한다는 복음의 역설적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저 아래에 있고, 영광이 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 높은 곳이야말로 죽음의 자리이며, 저 깊고 깊은 고통과 절망의 낮은 자리에 생명이, 구원이 있다는 성경의 진리 말입니다.
- 밝은 빛으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를 다룬 작품으로, 이름 없는 ‘소년’의 시선을 통해 폭력과 진실, 기억과 사랑을 말합니다. 광주의 잔혹한 진실과 그 너머의 인간다움을 그려냅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우리는 두 눈을 뜨고 마주 보아야 합니다. 그날의 진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뼈아픈 잘못과 그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그래야 합니다. 이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이제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끌어야 합니다.
한강의 이 문제의식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부활 후 예수의 물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부활한 예수, 침묵의 어둠을 지나온 예수, 고통의 시간을 오롯이 거쳐온 예수가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고통받는 자들을 기억하라, 그들을 먹이라, 그들과 함께하라.” 이 물음은 단지 과거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윤리적 물음입니다. 불의와 폭력, 차별과 고통이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 나가는 말
– 십자가를 지는 오늘의 우리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을 향해 서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잇는 통로요, 우리와 이웃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광주의 십자가는 그 수평의 고통이 하늘을 찌른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수직의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기억을 짊어지고 정의를 물 같이 흐르게 하며, 연대를 우리의 양심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제사장의 위엄보다, 사마리아인의 손길을 닮아야 합니다. 미가서 6장 8절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애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광주의 십자가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피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되 살아내라.
- 샨띠 샨띠 샨띠
토마스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 마지막 파트인 “천둥이 말한 것”(What the Thunder Said)은 이 시 전체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가진 부분입니다. 물 없는 사막 같은 대지, 바위와 모래뿐인 곳입니다. 그곳은 황폐하고 절망적인 인간의 삶과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살아 있었던 자는 죽었고, 우리는 살아 있지만 죽어가고 있다.” 그곳에 천둥의 소리가 들립니다. 이 천둥의 소리는 절망적인 인간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이자, 새로운 생명과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을 상징합니다.
첫 번째 천둥소리 “닷따”는 “주라”는 뜻입니다. 움켜쥐기보다는 내어주라는 것이지요. 탐욕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오르는 길이 아닌 내려가는 길을 선택하라는 뜻이겠지요. 두 번째 천둥소리 “다야드밤”은 “동정하라” 공감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의 기도와 같은 의미지요.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면, 기쁨과 행복 또한 나누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 천둥소리 “담야따”는 “자제하라” 절제와 겸허함입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절제하고, 타인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허한 마음을 지니라는 것이지요. 세 단어는 인간 실존의 황무지를 넘어서기 위한 세 가지 영적 명령입니다. 이 천둥의 소리를 따를 때, 마침내 “샨띠, 샨띠, 샨띠” “평화여, 평화여, 평화여.” 이 세계에 평화가 임한다는 것이지요. 이 평화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이 평화는 고통을 통과한 자들만이 얻는 깊은 평화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정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광주에서 시작된 희생과 용서, 자제와 연대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 평화를 향한 길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샨띠, 샨띠, 샨띠…” 광주의 땅에도, 이 민족의 가슴에도, 이 땅의 교회에도 평화가 흐르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당신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때 그곳 광주에 계셨고, 오늘 우리 곁에도 함께 계십니다.
잊지 않게 하소서. 침묵하지 않게 하소서.
광주의 눈물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로 피어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