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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아들을 바쳐라!

아들을 바쳐라!

창세기 22:1-14, 성령강림절후 둘째 주일, 2011년 6월26일

 

     오늘의 제1 독서인 창 22:1-14절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일 이 사건을 신문기자가 취재했다면 아들살해 미수사건으로 다루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그는 자식을 신에게 잡아 바친 광신도쯤으로 간주되었을 겁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삭 번제 이야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은 딱 이 한 마디를 들은 것뿐입니다. 왜 번제로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생리학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얼마나 아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 아들을 양이나 소처럼 불에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서 필요한 장비를 갖춰 모리아 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을 어떻게 따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치 기계처럼 움직입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 제단을 쌓은 뒤에 이삭을 거기에 올려놓고 칼로 목을 따려는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불러 칼을 거두라고 했습니다.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는 것을 보니 하나님을 참되게 경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뿔이 수풀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던 숫양을 잡아 아들을 대신해서 번제로 바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아들의 목에 칼을 대라고 요구하는 신은 너무 잔인합니다. 이런 신은 정의롭다고, 사랑이 충만하다고, 인자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요? 아브라함이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시험한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종종 나옵니다. 욥의 이야기도 그 한 가지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을 시험하겠다고 하나님께 허락을 받습니다. 사탄의 농간으로 욥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재산도 없어지고, 욥은 심한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욥은 구더기가 기어 다니는 자기 몸을 기왓장으로 긁고 있었습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친구들의 주장과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주장을 물리친 욥은 결국 그 이전보다 더 좋은 삶의 조건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욥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자식까지 죽게 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성경은 왜 이런 이야기를 기록한 걸까요? 그게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일까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우선 이 본문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들을 번제로 바쳐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믿음으로 바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까지 바쳤는데 당신들은 무얼 바쳤느냐, 뭐가 아깝냐, 하고 노골적으로 압박하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용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더구나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의 ‘여호와 이레’라는 지명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사람이 볼 때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요구라 하더라도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신다는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부족해서 우리의 것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요구하면서 살 뿐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지 우리가 하나님의 부족을 채우는 게 아닙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당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 재산을 다 바쳐서 교회당을 지었다는 것도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교회당이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헌금도 필요 없고, 교회당도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살이에서도 밥이 없으면 굶어야 하는 것처럼 헌금이 없으면 교회 운영이 불가능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야 한다는 주장은 근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미래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자식을 번제로 바칠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을 바칠 바에야 자기를 바칠 겁니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당연히 이삭이 아니라 자기를 번제로 바쳤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을 지정했고, 아브라함은 그 명령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것이었습니다. 자기보다 이삭이 그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그의 미래는 오직 이삭에게 달렸습니다. 이삭이 없으면 자기의 재산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늘어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미래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신앙의 위인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을 보십시오.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노력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미래를 설계하라는 요구를 줄기차게 받습니다. 그게 모두의 관심사라는 뜻입니다. 요즘 서울과 서울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우스 푸어’라는 신조어가 유행합니다. 집을 가진 가난뱅이라는 뜻입니다. 일부 자기 돈과 일부 대출받은 돈으로 집을 샀지만 집값이 오르지 않아서 이자만 물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집은 한국 사람들에게 미래의 담보물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 없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교회가 자기 이름으로 된 교회당을 마련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습니다. 최근에 서울의 아무개 교회는 땅값 포함 2천억 원 상당의 교회당을 건축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무리하게 교회당을 건축하느라 부도를 내 교회도 많습니다. 대학의 반값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대학도 역시 미래에 대한 설계입니다. 사람은 늘 나름으로 미래를 준비하며 삽니다. 성실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런 노력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미래인 이삭을 포기했다는 겁니다. 이게 잘한 일인가요? 잘한 일이기 때문에 성경이 기록하고 있겠지요.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딜레마입니다. 미래를 포기하라는 성서의 요구와 미래를 준비하라는 세상의 요구 사이에서 힘들어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무엇이든지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면서 자신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세상의 삶을 포기하는 듯이 삽니다. 반면에 성경의 요구를 완전히 묵살하고 세상살이의 요령에만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그 중간에 엉거주춤한 태도로 살아가겠지요. 성경의 요구에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하고, 세상의 현실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면서 살아가겠지요.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거북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본문을 어느 정도 마사지해서 듣습니다. 아들을 바치는 일은 아브라함 같은 위인들에게만 가능한 거지 자신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모든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저 이야기를 전승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기서 구원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거기서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자신들의 설계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거기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이 되지 않지만, 외아들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 아브라함이 바로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설계에 두는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인지를 구분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별로 확실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도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닙니다. 그걸 부정하는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말도 분명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일들이 세상에 흔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어긋나는 일들이 세상에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미래를 맡기기는 정말 힘듭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외아들 이삭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게 인간의 실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의 통치, 그의 섭리가 막연하거나 혼란스럽고, 더 나가서 비현실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출애굽과 연관해서 수많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났고, 광야 40년 동안에도 굉장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초자연적인 사건들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이런 사건들이 그렇게 명백하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출애굽 직후부터 계속해서 애굽을 그리워했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통치가 분명한 게 아니었고, 그래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미래를 맡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신앙에서 실패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브라함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실제 역사에서 아들을 바치는 행위는 신앙의 오류입니다. 성서는 인신제사를 옹호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광신에서 겨우 벗어났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지몽매한 사람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에서 사람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것은 곧 인간으로부터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자기 자신에게 그 요구를 하시고, 이를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그 일을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칼을 이삭의 목에 꽂으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의 동작을 멈추게 하셨던 하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던 예수님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린 것입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요구에 순종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하나님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외아들인 예수님 덕분으로 하나님의 미래에, 즉 영원한 생명인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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