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16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5f9eeo2ttqo?si=MijcBsrFWm0Up8hA
▣ 들어가는 말
-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
사람은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나 지식, 사회적 지위나 명예, 재산이나 건강 등 다양한 욕심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심들 가운데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욕구,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 아닐까요.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은 바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아닐까 합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미카엘이라는 천사가 신의 명령으로 한 여인의 영혼을 거두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갔는데, 그 여자는 막 쌍둥이를 낳은 병든 여인이었습니다. 며칠 전, 남편은 나무를 하다가 나무에 깔려 죽었고, 혼자 남은 여자가 쌍둥이 아이를 낳은 것이지요. 천사를 본 여자가 간절하게 부탁을 합니다. 자신을 데려가지 말라고, 이 아이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다고, 아이는 아버지나 엄마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사정이 너무나 딱해 천사는 신에게 돌아가 영혼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를 말하지요. 그러자 신은 그 여자의 영혼을 데려오고 천사는 날개를 빼앗고 벌거벗겨진 채로 땅 위에 보내집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진리를 배워야만 다시 천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하지요. 그 세 가지는 첫째, 사람에게 무엇이 있는지, 둘째,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는지, 셋째,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벌거벗은 채로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천사 미카엘은 그를 불쌍히 여겨준 지독히 가난한 구두 수선공 시몬과 그의 아내에게서 ①사람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신을 튼튼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만, 불행히도 장화를 주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죽음을 맞이한 한 부유한 사람을 보면서 ②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힘이 주어지지 않았음을 배우지요. 그리고 어느 날 쌍둥이 여자아이들을 데리고 시몬의 오두막을 찾아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친자식보다 더 극진한 사랑으로 쌍둥이 아이를 기르는 여인의 모습을 통해 ③사람은 자신을 위한 걱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화 같은 짧은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깊은 통찰을 줄 수 있는지… 톨스토이를 대문호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고귀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 사랑을 방해하는 것
이렇게 분명하고 단순하며 명확한 진리가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의 삶은 왜 이리도 추하고 일그러져 있을까요. 심리학에서 보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 진실한 사랑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열등감입니다. 이 열등감은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고 합니다.
열등감은 주로 비교의식을 통해서 나오는데, 언제나 비교를 통해서 상대적인 가치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대부분 경우 비교의 대상은 언제나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비하하고 자신의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지요. 반면에, 상대적인 비교우위를 점했다 하더라도 비교를 통한 우월의식은 또 다른 열등감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존재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비교를 통한 가치를 확보하려 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가장 흔하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나 혼자’라고 하는 절망적인 외로움에 사로잡히고 말지요. 그리고 나아가 이 외로움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난 왜 이렇지?’ ‘근데 저 녀석은 왜 저렇게 잘났어?’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비교를 통한 열등감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비교를 통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온전한 가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가치는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감동적인 동화 같은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오늘의 본문을 서사적, 이야기식으로 풀어볼까 합니다. 한동안 너무 철학적, 비평적 설교로 메말라 있었던 것 같네요.^^)
▣ 순결한 삭개오
- 부정한 사람 / 순결한 사람
오늘은 이렇게 인간의 심리적 측면, 특히 열등감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성서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라는 인물은 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하다’, ‘의롭다’라는 뜻입니다. 아마 그의 부모님들이 의롭고 순결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어 주었겠지요. 어쩌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그의 삶은 그리 평탄치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키가 작아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고, 남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외톨이가 되어야 했겠지요.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몸의 질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삭개오는 ‘부정한 아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집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삭개오 하고는 놀지 말라’ ‘그 아이는 하나님이 저주하신 아이야’… 차마 아이에게는 할 수 없는 말들까지도 들어야 했습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과 다른 외모로 엄청난 좌절과 죄책감,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나님은 왜 나를 저주하셨을까?’ ‘나의 부모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에게 이런 저주가 임했을까?’ 혼자서 외로움에 울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울었을 것입니다. 지독한 외로움과 열등감은 타인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바뀌었겠지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자신을 비웃는 이웃을 저주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하나님을 저주하며 이를 갈았겠지요. ‘두고 봐, 언젠가는 후회하게 만들고야 말겠어.’ ‘너희들이 내 앞에서 눈물 흘리는 꼴을 보고야 말겠어.’ ‘그렇게 잘난 너희들이 내 발 앞에 매달려 애원하게 만들어 주겠어.’
- 복수를 성취하다.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됩니다. 이제 그는 남들이 뭐라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성공을 향해 달려갑니다. 미친 듯이 돈을 법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누가 뭐라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로마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은 없습니다. 돈과 로마의 신임! 그것만이 삭개오의 희망입니다. 그것이 동족을 배반하는 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상관없습니다. 동족이 자기에게 준 것은 죄인이라는 굴레와 소외감뿐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단단히 무장시키고 갈수록 더욱 악랄하게 돈을 모읍니다. 드디어 그는 여리고라는 대도시의 세리장이 됩니다. 로마제국의 확실한 신임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제 바라던 대로 많은 사람이 자기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굽실댑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악랄하게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입니다.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조소하며 즐깁니다. ‘어떠냐? 이놈들아! 너희들도 한번 당해봐라!’ 그의 악명은 높아만 갑니다. 그의 재산도 늘어만 갑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권력으로 동족들을 괴롭히며 마음껏 조롱합니다. 화려한 파티에 참여하고 로마인들과 어울리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 한편엔 언제나 허전한 그 무엇이 자리 잡습니다. 재산은 늘어만 가며, 지위는 점점 높아만 가지만, 오히려 공허감은 더욱 커가는 것은 왜일까요?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한 척, 강한 척, 냉정한 척… 악착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너무나 외롭습니다. 사람 냄새가 그립습니다. 사무치듯 하는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웃던 사람들을 괴롭히고 화려한 파티에 근사한 옷을 차려 입어보지만… 그의 외로움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그 누구든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누구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가진 재산과 지위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들일 뿐, 겉으로는 자신을 존경하는 척,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에서는 자신을 증오하고 저주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웃과 동족들에게 외면당합니다. 심지어 가족들과 자식들마저도 자신을 싫어하는… 지독스러운 외로움에 몸서리가 쳐집니다.
▣ 예수를 만나다!
- 희망을 찾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몸서리치는 삭개오에게 어느 날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그 사람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죽은 사람마저도 살려낸다고 합니다. 더 흥미 있는 것은 그 사람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창녀들, 세리들, 죄인들과도 함께 먹으며 그들의 친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거룩한 척하는 율법 학자, 종교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독설을 퍼부어 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일까?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나를 친구로 대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나마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때, 예수가 여리고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럴 수가… 정말로 그가 온다는 말인가? 내가 살고 있는 이곳으로? 그는 정말 소문으로 듣던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헛소문에 불과할까?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이제껏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지만 정말 거룩하다고 느낀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모두 들 삭개오가 가진 권력과 재산에 굽실거리던 속물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고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가 온다니 일단 구경이라도 해봐야 겠습니다.
- 예수를 만나다
예수가 온다는 길거리로 나가봅니다. 이미 그곳에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지요. 온통 인산인해… 사람들은 난쟁이인 삭개오에게 길을 내주지 않습니다. 그가 가진 권력이나 힘도 예수를 보는 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일부러 사람들은 그를 가로막기까지 합니다. 예수가 오는 모양입니다. 왁자지껄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예수를 향해 환호하고 사람들이 있습니다. 군중 속에 묻힌 예수를 아무리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를 가로막는 사람들의 벽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까짓, 그는 용기를 내서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었을까요. 그렇게 으스대며 잘난체하던 삭개오가, 그것도 난쟁이가 나무에 기어오르는 모습이란… 어린 시절 키가 작아서 나무에 올라갔다고 놀림을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나무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다시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껏 멸시받으며 살아왔던 자신의 세월을 세상의 그 누구 하나는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에게도 희망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예수는 그가 올라간 뽕나무 아래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예수는 걸음을 멈추고 나무 위의 삭개오를 올려 다 봅니다.
그리고… 너무나 뜻밖의 말이 예수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서 지내고 싶구나…” 주위의 사람들이 말했다. ‘주님 저자는 세리입니다. 아주 질이 나쁜 놈입니다.’ ‘민족의 배신자입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저런 놈의 집은 안 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내려왔던 삭개오의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입니다. ‘역시, 예수도 나를 버리는구나!’ 여전히 그에게는 둘러싼 인간들의 증오와 멸시와 차별의 벽은 넘을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있구나…
그러나 예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지 못한 것처럼 빙그레 웃으며, 삭개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기꺼이 삭개오를 따라나섭니다. 그에게 어떤 추궁이나 꾸지람도 없이 그의 대접을 기쁘게 받아줍니다. 어떤 편견도 없이 함께 먹고, 마시며, 웃습니다. 삭개오 마음의 깊은 상처는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소위 경건한 종교지도자들은 얼마나 거룩한 말들을 그에게 쏟아부었던가… 그러나 그들은 막상 삭개오의 돈에 아부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죄인이라고 상종도 하지 않는 표리부동한 자들이었습니다. 누구도 단 한 번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삭개오를 이해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말들을 쏟아놓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다고 죄인으로 질타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다른 여느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사심 없이 삭개오가 베푼 음식들을 기쁘게 먹으며 교제를 나눕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봅니다. 한 번도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눈빛입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따스함입니다.
▣ 구원이 찾아오다!
- 자신을 찾다!
삭개오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그는 동족들이 그리도 미워하고 싫어할 만큼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곡된 이미지와 편견으로 바라보았기에 깊은 오해를 낳은 것인지도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예수였으나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자보다 당당히 사신 주님! 그 주님 앞에서 비로소 삭개오는 깨닫습니다. 돈이 그의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외모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인간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로서 가치 있고 귀하게 보는 예수의 시선이, 삭개오의 상처 난 가슴을 이해하신 주님의 사랑이 그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무엇에 그리 집착하느냐? 무엇을 그리 놓지 못하고 움켜잡고 있느냐? 열등감도, 재물도 모두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자유 하거라.” “사랑하여라”
그랬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을 향한 미움과 증오를 쌓아 올린 것은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타인의 눈, 세계의 눈으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자신마저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본인마저도 자기 안에 있는 거룩함을, 온전함을,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왜곡된 자신의 추함과 못남을 채우기 위해 쓸모없는 복수심으로 증오와 미움으로 자신을 숨기고 포장해 왔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겉보기에 화려하고 강한 것을 그토록 집착해 왔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니, 타인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미워하니 타인을 미워할 수밖에요. 높고 높은 벽을 쌓아 올리고서는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외로움에 몸서리친 것이지요.
- 사랑을 얻다
재물을 나눠줍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의 벽을 허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악랄한 로마의 세리장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이 보입니다. 높은 곳보다 낮은 곳으로 시선이 바뀝니다. 물론 로마로부터 무능한 세리장으로 낙인찍혀 파면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살아온 삶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하며 더 이상 괴롭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그가 마음을 허물고 가난해질수록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구원을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온전한 자신을 찾는 것,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찾는 것,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거룩한 아브라함의 자손,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인식한, 진정한 사랑을 찾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 아닐까요. 사랑은 얻으려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사랑의 존재’가 될 때, 저절로 뒤따라오는 결과물 아닐까요.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인 것이지요. ‘나는 사랑인가’ 존재 물음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구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올라가기보다,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고, 더 많이 나누는 존재가 되기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
주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길은 오직 사랑임을 깨닫게 하소서.
마음을 다해 사랑하므로 찾아오는 구원을 경험하게 하소서.
사랑만이 치유하며, 회복하며, 평안에 이르게 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고 사랑하고 미치도록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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