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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2007.04.22. 요 21:1-14
저 분은 주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느냐, 혹은 아느냐 하고 묻는다면 대부분은 “말이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보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부활 현상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입니다. 부활 사건 직후에는 아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요 20:9절에 따르면 베드로와 요한은 빈무덤을 보았지만 “예수께서 죽었다가 반드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성서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 요 24-29절에는 토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던 토마도 말만 듣고는 믿지 못한다고 했는데, 현대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만약 어떤 종교 전략가가 기독교를 창설했다면 부활 이야기는 제쳐놓았을 겁니다. 부활 없이도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배우고 따를만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귀한 가르침들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키고 삭개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것만 해도 공자나 석가 못지않은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부활은 오히려 현대 지성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사건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병이 낫는다거나 도덕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모든 기독교적인 삶은 무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배수진과 같습니다.

티베리야 호숫가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설명할 수 있으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안타깝지만 이에 관한 복음서의 설명도 별로 논리적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과 분명히 죽어서 무덤에 묻히셨던 분이 제자에게 다시 나타났다는 사실만이 단편적으로 보도됩니다. 이런 증거만 놓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요한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 찜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20장으로 이미 일단락된 복음서에 21장을 보충합니다. 요한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기술된 20:30,31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이 원래 20장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순전히 예수님의 부활 문제를 강조하기 위해서 21장을 보충한 것입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21장의 저자를 다른 사람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런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지 두 장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다루고 있는 20장과 21장 사이에는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큽니다. 약간 어색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20장에는 세 번의 부활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1)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난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물론 그곳은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근처의 아리마태아 요셉의 가족 묘지입니다. 2) 그날 저녁에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3) 여드레 후에 앞서 언급한대로 주님은 토마가 포함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물론 이곳도 예루살렘입니다.
오늘 본문인 요 21:1-14절의 배경은 20장과 전혀 다릅니다. 이곳은 가나안의 남쪽 지역인 유대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북쪽 지역인 갈릴리의 티베리아 호숫가입니다. 일곱 명의 제자들이 왜 그곳에 모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10절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이 갈릴리로 간다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이 곧 일곱 명의 제자들이 티베리아 호숫가로 몰려온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일상생활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동료들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그들이 모두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그들이 확실하게 믿었다면 지금 한가하게 고기를 잡으러 다닐 때가 아닙니다. 또한 그건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는 걸 보면 예수님의 부활이 여전히 그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베드로의 제안에 따라서 고기를 잡으러 나선 이들은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부활의 주님은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무엇을 좀 잡았나 하고 물었고, 제자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아주 일상적인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일렀습니다. 그 말을 따르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장면에 대한 보도인 누가복음 5장(1-11절)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직 베드로라는 이름을 받기 이전인 시몬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날 밤에도 시몬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그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졌고,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두 이야기가 비슷한 이유는 한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든지 아니면 각각의 서로 다른 전승이 우연하게 맞아떨어졌다는 데에 있겠지요. 오늘 우리가 그 모든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경험은 제자가 된다는 것과 긴밀히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잘 돌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만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제 본문이 새롭게 발전됩니다.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던 제자인 요한이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그물에 많은 고기가 잡힌 걸 보고 처음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 받던 그 순간을 기억한 것인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그 특유의 성격으로 몸에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제자들은 그물을 챙긴 후 배를 끌고 뭍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육지에 숯불, 생선, 빵이 놓인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게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려 고기를 헤아리자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숫자가 베드로에 의해서 전도된 사람들의 숫자라고 말하기도합니다. 12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일상적인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 티베리아 호숫가의 사건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각주(脚註)를 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처음 나타난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가 아니어서 숫자에서 제외된 것 같습니다.

묻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그 흐름이 별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거리가 백 미터쯤 떨어진 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자들이 허겁지겁 육지로 가서 예수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성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분명히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가 매장까지 당하신 선생님이 다시 자기들 앞에 나타나셨다면 무언가 질문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들은 아무 말도 없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무덤에 있었던 삼일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진 것인지, 정말 부활하신 건지, 당신이 바로 그 예수님이신지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기자는 그 이유를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합니다.(12절)
여러분, 지금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원초적 자리로 들어온 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두 가지 분명한 사실에 근거합니다. 첫째,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진술에 논리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사건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님의 부활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근거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기계적 역학은 그 이전의 이론에 의해서 이 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이론인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이 별로 신빙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부분적인 진리인식이라는 뜻입니다. 자연과학을 말이 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하나님의 사건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현현은 제자들에게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제자 자신들도 부활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만은 아주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그럴듯한 말로 꾸미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앞뒤가 딱 떨어지는, 알리바이가 되는 이야기로 각색하지 않고, 거칠지만 자신들의 경험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습니다. 자신들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꼼꼼하게 설명할 자신은 없었지만, 죽었던 예수님이 자신들 앞에 나타난 것만은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훗날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경험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를 비롯한 여러 편지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사실을 그대로 믿습니까? 믿을 수 있나요? 믿기 전에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는 그렇게 믿기 쉽지 않습니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면 믿는 시늉을 하겠지만 정말 그런가 하고 따지고 들면 믿지 못할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말이 안 되는 것을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고 단지 제자들의 경험만 있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뿐만 아니라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이기도 합니다. 말이 안 되는 사건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분명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말이 안 되는 걸 믿으라고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말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말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에 가서 모든 창조의 비밀이 드러나게 될 그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실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요령껏 설명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이 완성된 종말로부터 거꾸로 돌입한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그 종말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사건을 경험한 것뿐입니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을 아주 평범한 제자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어떤 소년이 혼자서 UFO를 만난 것과 비슷한지 모르겠군요.
여러분은 성서에 근거한 저의 이런 설명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즉 종말의 생명이 어떻게 현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면 더 좋지만 잘 이해가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 자기의 삶을 의존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부활생명을 환하게 경험할 것입니다. 그 생명의 놀라움 앞에서 기쁜 노래를 부를 날일 올 것입니다. 본문 7절에 요한의 외마디가 여러분의 입에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저분은 주심이십니다.”
요한복음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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