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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창조의 빛, 인식의 빛

 

창조의 빛, 인식의 빛

(고후 4:1-6)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리는 절기인 주현절(主顯節)은 1월6일입니다. 그 다음의 첫 주일을 주현절 첫 주일이라고 부르는데, 사순절이 시작되는 성회 수요일 전까지 계속됩니다. 주현절의 길이는 매년 달라집니다. 작년에는 네 주간이었고, 금년에는 일곱 주간입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이유는 부활절이 유대교의 유월절 절기와 연관되는 반면에 주현절의 뿌리인 성탄절이 일반 태양력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주현절을 ‘빛의 축제절’이라고도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성탄절도 빛과 연관됩니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지나고 낮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하는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들에게 비추는 빛이라고 설명했습니다.(요 1:9) 이 빛은 생명이었습니다. 이 세상 만물 안에 있는 생명은 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빛, 생명, 예수님을 신앙의 차원에서 한 묶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빛이 생명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고대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건 물리학에서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생명의 가장 밑바닥에는 빛, 탄소, 물에 의한 광합성 현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빛이 없다면 생명도 불가능합니다. 빛보다 물이 더 본질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그래도 빛은 생명 현상에서 필요불가결한 요소라는 말은 틀린 게 아닙니다. 특히 고대인들에게는 빛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빛이 주는 밝음과 열은 생명의 절대 조건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그런 빛이며, 생명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 인식이 옳은가요?


인식의 빛

오늘 설교의 본문인 고후 4:1-6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를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것을 아는 빛을 우리의 마음에 비쳐주셨다고 합니다. 진리를 아는 능력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 스스로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다고 생각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 노력을 많이 한 사람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니까 그렇게 생각 할만도 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으면 계산을 잘 할 뿐이지 진리를 깨닫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림 그리는 솜씨가 좋다고 해서 모두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건 아닙니다. 말을 잘 한다고 해서 모두가 위대한 시인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진리는 내가 노력해서 터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진리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시인 오인태의 <아버지의 집>이라는 시집에 “시가 내게 왔다”라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한 번도 시를 쓴 일이 없다
   시가 내게 왔다 늘
   세상의 말은 실없다
   하여 다 놓아버리고 토씨 하나
   마저 죽여, 마침내
   말의 무덤 같이 허망한 적요
   위에 파르르 떤 달
   빛 같이 내려서
   시인의 몸 안에 들어와서
   젖어오는 것이다.
   거부할 수없이
   시가 내게 왔다.

‘시가 내게 왔다’는 표현은 성령이 내게 왔다거나 하나님의 계시가 내게 왔다는 성서적 표현과 일맥상통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인식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것입니다.

거꾸로 궁극적인 진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빛이 비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요 1:5) 나무를 보십시오. 빛이 비추지 않으면 자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어둠에 빠지면 그 나무는 죽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명석한 두뇌가 있다고 하더라도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볼 수도, 깨달을 수도, 인식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참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둠 속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를뿐더러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지만 빛의 세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기에 답답해하기만 합니다. 마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살리에리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주어진 음악적 재능이 부족해서 모차르트 앞에서 자기의 운명을 한탄했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신앙 세계에서도 이런 일들은 자주 일어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세상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고 말입니다.(고후 4:4) 하나님이 따로 있고 세상의 신이 따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신은 욥을 시험하거나 공생애 출발 전의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처럼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악한 세력이라는 뜻입니다. 그 세력은 너무 강력해서 마치 신의 능력처럼 보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런 악한 능력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복음에 가려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악한 신에 사로잡혀 마음이 혼미해졌고, 그래서 복음의 광채에 비추임을 당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세상의 신을 언급한 이유는 복음이 가려진 이유를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외모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가문도 아니었습니다. 아무 것도 그것에 대한 정확한 해명이 못됩니다. 이와 반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왜 우리를 선택하셨는지, 우리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셨는지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알 수 있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췄다는 바울의 고백을 그대로 따를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그 빛은 창조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시작은 바로 그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있어야만 생명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물의 인식이 가능합니다.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곳에서는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빛을 가장 나중에 창조했다면 그 이전의 창조는 무의미했을 겁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이 빛은 생명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인식의 근원입니다. 바로 그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췄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결코 복음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바울의 말은 옳습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서 인식의 근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노력에 앞서 하나님의 빛이 먼저 우리 마음을 비추었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여기 철부지 아이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철이 나야 합니다. 철이 난다는 것은 인간관계의 근본을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철이 일찍 나는 아이가 있고, 좀 늦는 아이가 있고, 죽을 때까지 철이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날까요? 진리의 빛이 그 아이의 마음을 비추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을 인식하는 것도 이처럼 하나님의 빛이, 그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출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 하나님의 영광

신앙적 인식이 일상에서 철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두 인식이 똑같은 차원은 아닙니다. 신앙의 인식은 훨씬 근본적이고 본질적입니다. 훨씬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이유는 그 인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이기(고후 4:6)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고후 4:4b)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지적인 능력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얼굴을 아무리 자세하게 뜯어봐도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문신처럼 그려지거나 글자로 새겨진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처럼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오랜 전 영국의 어떤 학자가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컴퓨터로 복원해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노동자로 살던 서른 살 내외의 일반적인 유대 남자를 추정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초상화로 나온 그림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긴 머리에 지성적이고 영적인 느낌이 넘치는 매력적인 백인 남자였지만, 컴퓨터가 과학적인 근거로 찾아낸 그림은 아주 평범한 고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그를 믿었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할까요?

여기서 예수님의 얼굴은 외모가 아니라 그분의 인격을 가리킵니다. 인격은 그의 모든 삶을 가리킵니다. 그의 가르침, 그의 행위, 그의 믿음, 그의 운명을 모두 통틀어서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원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하나님의 구원이 현재한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믿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식의 빛을 주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상한 말로 들리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거기로 돌아서라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 심하게 거절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아무런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쪽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게 메타노이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런 신앙을 유치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와는 구별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필요로 한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만 묶여 있었던 탓에 예수님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도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아무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당시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던 바리새인이나 바울과 대립하던 사람들이 어딘가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원만하고 균형 감각이 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옳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생각하고 경험한 신앙의 차원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옳다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 증거를 대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잘 믿고 있으니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거절한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리라고 봅니다. 그러기를 바라고,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예수님의 얼굴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는 좀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거절한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종교적 욕망을 믿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마음에 창조의 빛이 비쳐지지 않은 사람들이며, 더 심한 경우로 세상의 신에 의해서 마음이 여전히 혼미해진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또는 이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닐는지요. 예수를 통한 구원 신비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와 참된 인식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희미하게 비친다는 뜻일까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식하려면 생각 전체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와 그 미래를 향해서 돌아서는 게 회심이듯이 우리의 생각 전체를 바꾸는 것이 회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이 비춰진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핵심에는 생명이 놓여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완전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명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지난 금요일에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온 국민의 애도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한 종교 지도자의 죽음이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킨 경우도 드믑니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추기경이자 세계에서 최연소로 추기경이 되었으며, 그의 소박한 삶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군사독재와의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어려운 시절에 한국 민중들이 존경할만한 지도자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요. 어제 김 추기경이 1미터 깊이의 땅에 묻히는 장면도 생생하게 공중파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영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이나 별 볼일 없는 이나 죽으면 모두 땅 속으로 들어갑니다. 좋은 관에 담기든지 허술한 관에 담기든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몸은 조금 후에 완전히 해체됩니다. 거기까지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손 쓸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거기로부터, 즉 인간의 절대 한계상황으로부터 그것을 거슬러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하셨습니다. 그 변화가 궁극적인 구원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 예수님의 운명에서만 완전한 생명이 시작되었다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식은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빛이 우리 마음을 비출 때만 가능합니다. 그창조 하나님, 저희 마음을 비추소서. 아멘! (09.02.22)

고린도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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